며칠 전 천장 인테리어 작업을 하다 낮은 사다리에서 '쿵' 하고 넘어지며 머리를 부딪혀 사망한 한 남성. 하지만 단순히 '사고사'라고 하기에는 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사다리의 높이가 1m도 채 되지 않았던데다, 보통은 넘어지면서 팔이나 엉덩이를 먼저 부딪히게 마련이지만 그는 넘어지면서"어~!"소리 한번 내지않은 채 뒤로 넘어지며 머리를 부딪혔던 것. 그는 평소 고혈압 약을 복용 중이었다. 불의의 사고로 인한 사망인지, 아니면 지병으로 인해 뇌출혈이 생겼고 이로 인해 그가 급작스레 쓰러진 것인지 사인이 모호했다. 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법의학자의 판단이 필요했다.
◆시신과 대화하는 사람들
흔히'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말하고픈 욕구마저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다. 죽은 자들은 왜 그런 죽음을 맞이해야 했는가를 몸 속 어딘가에 꽁꽁 숨은 '사인'(sign·신호)으로 숨겨놓는다. 이것이 아무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인체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갖추고 있고, 또 망자의 사연에 기꺼이 귀를 기우리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만 그들은 암호와도 같은 숨은 사연을 털어놓는다.
경북대 의대 법의학교실은 지역에서 발생하는 사건 부검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그 주축은 곽정식(64), 채종민(59), 이상한(46) 교수이다.
흔히 사람들은 부검을'망자를 위한 절차'로 이해한다. 하지만 이들 3인방은"산 자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아무리 억울한 죽음의 사연을 밝힌다 하더라도 죽은 자는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산 자에게는 교훈이 되기 때문이다. 채 교수는"범죄 처벌과 예방을 통한 치안 유지와 사회정의 확립에 도움이 되며, 교통사고의 원인을 찾아 개선책을 마련할 수도 있다"며"질병의 원인을 파악해 예방차원의 치료를 할 수도 있으니 결국은 산 자를 위한 행위 아니겠느냐"고 설명했다.
◆한국 법의학, 세계 최고 수준
푸껫 쓰나미 참사 때 자국민 신원을 모두 밝힌 나라는 한국이 유일했다. 그만큼 우니나라 법의학 수준이 탁월하다는 이야기다. 그 중에서도 경북대 법의학교실의 실력은 널리 정평이 나 있다. 2002년 사건발생 11년 만에 발견된 개구리소년 유골을 두고, 이들이'타살'됐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채 교수는"뼈에 남아있는 골절의 흔적과 미상의 발사물에 의한 상처 등으로 봐서 치명적인 외상에 의한 사망으로 결론내렸다"고 했다. 또 지하철 참사 때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관들과 협력해 시신 60구의 신원확인 업무를 맡았다.
곽 교수는 "우리나라 법의학 수준이 높은 것은 기본적으로 우리나라 의학 수준이 세계 최고 수준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다 연간 200~300건에 달하는 부검을 맡아야 할 정도로 사례 경험이 많다 보니 당연히 사건해결 능력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명의'와 '명탐정'의 자질을 골고루 갖춘 이들이라 할지라도 가끔'아무런 소견이 없는'부검 사례도 있다고 했다. 사소한 몇 가지 흔적은 있어도 사인(死因)이 될 만한 중요한 원인을 찾지 못했을 때다. 대부분 나라에서도 이런'무소견'부검이 3~5% 정도를 차지한다는 것. 이때부터는 끊임없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도저히'답'이 보이지 않을 때는 서류부터 모든 자료를 다시 검토한다. 며칠 동안 심지어는 몇 달이 소요될 때도 있다.
법의학자가 일을 하는 시간은 부검실에 있는 것이 전부인 것으로 비치기 십상이지만 사실 부검실에 있는 시간보다는 서류 작업에 보내는 시간이 몇 배 더 길다. 이 교수는"단순히 부검실에서의 일만 놓고 본다면 간단한 일이겠지만 각종 법적 판단의 근거가 되는 감정서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각종 진료기록에서부터 서류를 꼼꼼히 살펴 사건의 퍼즐을 명확하게 끼워맞추는 긴 고민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국내 법의학자 50명 불과
우리나라 국과수 법의관은 현재 19명이다. 고작 23명인 정원도 못 채우는 현실이다. 환자를 진료하는 임상의사가 되는 것보다 처우가 못하기 때문에 하겠다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다 법의학교실 교수까지 합쳐도 전국적으로 50명이 채 되지 않는다. 곽 교수는 "중국 요동성만 따져도 300명의 법의학자가 있다"며 "부끄러워 어디 가서 말도 못 꺼낸다"고 혀를 찼다.
이처럼 법의학자 수가 절대 부족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자리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법의학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해보겠다는 꿈을 품는 학생들은 많지만 변변한 일자리 수가 제한돼 있다보니 오히려 교수들이 '만류'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채 교수는 "그 직업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명예나 경제적 안정 가운데 하나는 충족돼야 하는데 국과수 법의관이나 의대 교수로 일을 할 수 있는 자리가 너무 제한적이다보니 학생들이 법의학을 전공하겠다고 해도 걱정부터 앞선다"고 했다. 현재 전국 41개 의과대학 중 12곳만이 법의학교실을 운영하고 있지만, 그나마도 전공 교수가 없는 곳도 상당수라고 한다.
이 때문에 적은 인력이 수많은 부검을 담당하면서 당연히 현장을 나가는 것은 꿈도 못꾼다. 현재 법상으로 법의학자가 사건 현장을 가야할 의무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현장에 갈 만큼 인력이 여유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현장의 분위기를 돌아볼 수 있으면 사건의 이유를 찾는 일이 좀 더 빠르고 명쾌할 수 있지만 지금의 현실에서는 역부족이다.
◆검시법 제도화의 필요성
3명의 교수는 "검시법 제정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억울한 죽음은 누구나가 당할 수 있는 일이지만 법이 마련돼 있지 않다보니 죽음에도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부검을 통해 억울한 죽음의 사연을 밝히고 한을 풀지만, 누군가는 그 기회조차 갖질 못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를 막아주는 것이 바로 검시법이다. 최소한 어떤 경우의 죽음에 대해서는 법으로 무조건 부검이 이뤄지도록 정해 놓자는 것이다.
이것은 사건 현장에 법의학 전문가가 갈 수 없는 현재의 제도 때문이다. 전공에 관계없이 의사자격증만 있으면 누구나 현장 검안을 할 수 있고, 법의학 전문가가 아닌 경찰이 현장 조사를 끝내고 보고서를 작성해 검찰에 보내면 이를 바탕으로 검사가 부검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정작 부검이 필요한데도 그냥 지나치는 사건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더구나 우리는 부검률이 전체 사망자의 1%도 채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최근 미국에서 1년 동안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이 교수는 "미국의 경우에는 전체 사망자 중 7~10%, 도시에 따라 최고 20% 정도까지 부검이 이뤄지지만 우리는 턱없이 낮은 수준"이라며 "이 때문에 범죄 관련성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묻혀버리는 사건들도 꽤 될 것으로 추정한다"고 했다.
◆사랑과 유머가 있는 보통 사람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는 없겠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특히'죽음'과 관련된 것에 대해 거부감이 강하다. 그래서 늘 시신을 접하고 사는 법의학자라는 직업에 대해 오해와 편견도 많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늘 죽음을 옆에 두고 살다보니 '시니컬할 것이다' 혹은 '성격이 괴팍할 것이다'는 편견이다. 여기에 대해 이 교수는 "아무래도 좀 더 꼼꼼하고 철저할 필요가 있긴 하지만, 이곳도 사람사는 세상"이라며 "법의학을 다룬 드라마 속에도 로맨스가 있고, 우정도 있는 것처럼 이곳 역시 웃음과 유머도 있고, 사랑도 있는 곳"이라고 했다.
다만 이들은 직업으로 매일같이 시신과 맞닥뜨려야 하다 보니 가급적 감정을 배제한 채 일을 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곽 교수는 "1967년인가 학생 때 처음 부검과정을 지켜보게 된 적이 있었는데 그게 꽤 충격으로 다가왔는지 그 여성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 속에 또렷하게 남아있다"며 "하지만 그 이후로는 일로 사체를 대했기 때문에 직접 맡았던 첫 부검의 기억 같은 것은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곽 교수와 채 교수는 병리학을 전공하다보니 법의학을 함께 하게 됐다고 했다. 그러던 중 1988년 경북대에 법의학교실이 부활하면서 법의학자로 본격적인 길을 걷게 됐다. 병리학과에 그대로 남을 수도 있었지만 굳이 법의학의 길을 택하게 된 것은 죽은 자가 누려야 할 권리를 누군가는 찾아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호기심 많은 이 교수는 "부검실에 있을 때가 가장 편안하고 행복하다"고 표현했다. 그는 "시신과 있다는 꺼림칙한 생각보다는 조용히 그들의 말을 듣는 시간이 좋다"며"책에서 봤던 신체의 흔적,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발견해 사건의 퍼즐을 맞췄을 때의 환희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고 했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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