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 속의 인물] '멋쟁이 작가' 이효석

'길은 지금 산허리에 걸려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릿듯이 흐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효석(1907~1942)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이다. 시(詩)인지 소설(小設)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섬세하고 아름답다. 토속적인 정서를 서정적으로 표현한 작가이지만, 실제로는 서구적인 삶을 지향한 멋쟁이였다.

1907년 오늘,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얼굴이 하얗고 허약했다. 경성제대를 졸업한 후 실업자 신세로 옹색하게 살았어도 옷차림은 늘 말쑥했고 여성처럼 나비 장식이 있는 구두를 신고 다녔다. '생활의 귀족은 못 되어도 정신의 귀족은 되겠다'는 신념 때문이다.

평양숭실전문학교 교수 시절, 장미 화원을 가꾸고 클래식을 듣는 것이 취미였다. 가족 식탁에는 버터와 통조림이 떨어지는 날이 없었다. 그런데도 작품은 '돈'(豚) '분녀'(粉女) '산' 등에서 보 듯 토속적인 성(性)본능과 향수적인 내용을 다뤘다. 그만큼 자신의 사고와 작품이 동떨어진 작가도 드물 것이다. 36세 때 뇌막염으로 죽기 직전, 간호사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도 "영화관에서는 무엇을 상영하지?"였다.

박병선(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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