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봉산과 주변 물길로 닭(학)이 춤추는 모양을 만들어낸 무계(舞鷄). 무계는 세월이 흘러 낙동강이 빚어낸 풍요로운 무계(茂溪)로 진화했다. 의봉산 무계산성이 역사를 품고, 무계역과 무계나루가 예부터 물류의 중심을 이룬 고령군 성산면 무계1리 무계마을.
풍부한 역사를 자랑하는 무계는 3단계로 지내는 동제의 풍습, 끈끈한 공동체의 결속력, 계몽 선각자 등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전통과 문화도 빛을 발하고 있다.
◆상·중·하당에서 지내는 마을 제사
무계는 1960년대 말까지 마을제사를 지냈다. 일반적으로 당산나무 앞에서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것과 함께 소장수의 넋을 달래고 가축의 안녕까지 빌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무계마을 동제는 3개 지역에서 3차례 제사를 올리는 방식으로 진행됐고, 따라서 제관도 항상 3명이었다.
마을 제사가 치러진 곳은 마을의 오래된 당나무(소나무)가 있는 상당, 가축의 무사함을 빌었던 고갯길 언저리의 중당, 마을 정자 '관정'이 있는 하당 등이었다. 하당은 6·25전쟁 때 포탄을 맞아 죽은 600년 된 옛 당산나무(팽나무)가 있던 자리다.
중당은 옛날 마을의 한 소장수가 산을 넘어가던 중 고갯길에서 변고를 당해 목숨을 잃자,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당집을 세워 소장수의 넋을 달래고 가축들이 잘 사육될 수 있도록 기원했다고 한다.
상당에서는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빌었고, 하당에서는 역병과 같은 나쁜 것들을 막아달라고 빌었다는 것.
제관은 매년 음력 정월 초사흘 대나무 대를 내려서 3명을 뽑은 뒤 정월 보름날까지 바깥출입을 자제하고 몸가짐을 바르게 해 부정을 타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동제는 닭이 울기 전 새벽 1시 30분쯤 상당에서 제일 먼저 제를 올린 뒤 마칠 때쯤 중당에서, 중당 제사를 마칠 때쯤 하당에서 차례로 제를 올렸다.
조복래(89) 씨는 동제를 지냈던 중당과 하당에 대해 설명했다.
"중당서 모시는 게 천왕대신이라. 옛날 마을에 가축을 돌보고 하던 사람이 죽은 자리지. 옛날 노인들이 나를 축관으로 할 때, 당집에서 축은 없고 제물만 채려 놓고 제를 올린 기라. 하당 정자나무는 6·25 때 포 때리가지고 죽었뿟어. 그래 새로 심었지. 팽나무로."
무계의 동제 풍습은 70년대 새마을운동을 시작하면서 미신타파와 관혼상제 간소화의 바람이 불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공동체의 산물, 마을회관·저수지·양수장
마을 저수지, 옛 마을회관, 양수장과 정미소 등은 무계마을 공동체의 대표적 상징물이다.
마을 중앙 앞쪽의 저수지는 1900년대 초반 주민들이 직접 힘을 모아 조성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못 규모를 확장했다 이용률이 다소 떨어지면서 일부를 메워 소공원으로 조성했다. 당초 이 못은 불을 끄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졌다.
임영종(72) 씨는 "옛날에 초가집을 다 짓고 사니까 갑자기 불이 나면 우물 퍼서 어떻게 불을 꺼. 윗대 어른들이 '우리 마을이 이래서 안 된다'며 동네 앞에 못을 판 뒤 겨울에 눈 녹인 거 모았다가 불이 나면 불 끄는 데 사용하려고 했지"라고 말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불을 끄는 소방수와 함께 농업용수로 활용하기 위해 못을 더 확장했다. 농경지에 물을 대거나 못자리(묘판)로 사용했던 것. 마을에 양수장을 건립하기 전까지 이 못은 소방수, 못자리, 농업용수 등 1석3조의 효과를 거뒀다.
하지만 마을 공동 저수지는 비가 내리지 않으면 좀처럼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고, 넓은 농경지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을 앞 낙동강도 수심이 크게 깊지 않아 물을 지속적으로 끌어 쓰기가 어려워 결국 인근 수심이 깊은 다산면 송곡2리 하로다마을(노다리)에 양수장을 짓기로 했다. 주민들은 1960년대 초반까지 강가에 공동으로 양버들(이태리포플러)을 심은 뒤 묘목을 팔아 수익을 올렸는데, 이 나무를 팔아 터를 매입한 뒤 양수장을 건립했다. 주민들은 직접 땅을 사들인 뒤 직접 수로를 파고 흙을 지고 날랐다.
오규환(78) 씨는 무계양수장을 송곡리에 설치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노다리에 양수장 차려놓은 건 벼랑이거든, 암석이라. 그래서 물이 굽이쳐 오면 패어 나가는 곳이라 언제든 안 막히게 흐르고 깊었지. 옛날에 못 먹고 살아도 힘을 모아서 만든 양수장이기 때문에 군의 지원을 받아 여태 마을 자체에서 이용하고 있는 거지."
무계 사람들은 6·25 이후 마을이 폐허가 된 상황에서도 무너진 집을 새로 짓기에 앞서 마을회관부터 건립했다고 한다. 개인보다 마을 공동체를 우선했다는 것. 무계는 6·25 격전지여서 마을 주민들이 모두 피란을 갔다 온 뒤 폐허만 남았다. 대다수 집들이 허물어졌고, 수령 600년이 넘은 팽나무도 그때 쓰러졌다고 한다. 당시 유일하게 남은 건물은 해주 오씨 재실인 이로재, 홍경래의 난 때 순절한 백우 정시를 모신 모의재뿐이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마을 일을 의논할 장소가 없어서는 안 된다며 각자 돈을 내고, 부역을 해 자신들의 집보다 먼저 마을회관을 지었다. 주민 대다수는 허물어진 자신들의 집터에 움막을 짓고 1년여를 살았다고 했다. 68년쯤에는 마을 공동 소유의 정미소를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다. 시설이 열악한 개인 정미소보다 더 신식으로 만든 '협동 정미소'였다.
단합이 잘 되는 무계는 공동체 일처리 방식도 독특하다. 무계는 이장이 통상 마을 대소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진두지휘하는 것과 달리 색다른 절차를 통해 마을 일을 처리한다. 무계에서 이장은 실질적인 마을 심부름꾼이다. 무계는 동회라는 공식 회의기구가 있고, 동회장을 비롯해 새마을지도자 1명, 개발위원 5명, 반장 5명, 감사 2명, 이장 1명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장이 군이나 면단위 주요 소식이나 안건을 전하면, 이 회의기구에서 논의한 뒤 그 결정사항을 전달받은 이장이 일을 집행하는 절차다.
임영종 이장은 "딴 데 가면 이장이 다 하거든. 근데 이 마을에서는 동회장이 새마을지도자를 비롯한 개발위원을 다 모아서 회의를 해가지고 이렇게 결론이 나면 이장이 일을 집행하지. 이 동네는 그런 제도가 있는데, 딴 데는 없어"라고 말했다.
◆마을 계몽의 선구자, 오시환
무계에는 손씨와 해주 오씨, 성산 이씨 등이 초창기 마을을 형성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지금까지 가장 많은 가구가 있고, 영향력이 큰 성씨가 해주 오씨다. 오씨는 병자호란 때 성주로 내려온 오씨의 후손이 이후 무계에 터를 잡은 뒤 약 300년 동안 뿌리를 내리고 있다.
무계마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이가 바로 오시환(1879~1938) 선생이다. 구한말에 태어난 오 선생은 의금부도사를 지낸 뒤 고향으로 내려와 마을 계몽에 앞장서다 일제강점기 때 세상을 떠났다. 마을에서 노름을 근절시키고, 문맹퇴치와 계몽에 앞장선 큰어른이었다고 한다. 오 선생은 농한기 때만 되면 일거리가 없어진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자꾸 노름을 하자, 이를 하지 못하도록 마을 분위기를 다잡았다. 대신 자신의 아래채를 서당으로 만들어 문맹인 주민들이 글을 깨치게 하고, 아이들에게는 예의범절을 가르쳤다고 한다.
조문석(78) 씨는 "그 어른이 우리 마을을 일으켰지. 이 할아버지가 노름도 없애고, 글자도 깨치게 하고, 그만큼 무서웠어. 이로재(해주 오씨의 재실)에서 이분 제 모시고, 계추 때 한 번씩 모여서 다 한잔씩 하고…"라고 말했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공동기획:매일신문·(사)인문사회연구소
◇마을조사팀 ▷작가 이가영·김수정 ▷사진 박민우 ▷지도일러스트 장병언
댓글 많은 뉴스
구미 '탄반 집회' 뜨거운 열기…전한길 "민주당, 삼족 멸할 범죄 저질러"
尹 대통령 탄핵재판 핵심축 무너져…탄핵 각하 주장 설득력 얻어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
이낙연 "'줄탄핵·줄기각' 이재명 책임…민주당 사과없이 뭉개는 것 문화돼"
尹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 임박…여의도 가득 메운 '탄핵 반대'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