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었다. 북한 보위부(국가안전보위부) 사람들이 총을 들고 쫓아왔다. 그들은 나(김혜영·가명·27·여)에게 '조국 배반자'라며 총알을 퍼부었다. 꿈 속에서 나는 수십 번 죽었다. 중국에 숨어 있다가 북으로 다시 끌려갔던 나의 거친 과거가 꿈으로 나타난 것이다. 죽을 고비를 수 차례 넘긴 뒤 밟은 한국 땅은 내게 천국이었다.
◆죽음의 수용소
2000년 6월 18일, 내가 16살 때였다. 엄마(김경자·가명·53)와 나는 북한에서 도망나온 뒤 중국 옌벤에서 숨어 지내고 있었다. 중국 남자에게 팔려왔던 엄마와 잠시 헤어져 조선족 식당에서 혼자 주방일을 거들다가 중국 경찰에게 끌려갔다. 누가 신고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다시 북으로 돌아가면 죽는다는 것이었다. 북으로 먼저 잡혀갔던 이모와 삼촌이 총살을 당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강제수용소 3층에 갇혔다. 쥐가 우글거리는 좁은 방에 15명이 동물처럼 사육되는 곳이었다. 하루 식사는 단 두 번, 아무것도 없는 국수 면발이 전부였다. 한 달 넘게 국수만 먹자 항문에서 거품이 나왔다. 이대로 굶어 죽을 수는 없었다. 수용소로 끌려온 지 두 달째 되던 날, 모두가 잠든 밤 담요를 엮어 줄을 만들었고 창문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낡아빠진 담요는 썩은 동아줄이었다. 절반도 채 못 가 줄이 끊어졌고 내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이 온몸에 전해졌다. 그래도 무작정 뛰었다. 굶어 죽으나 잡혀서 죽으나 죽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엄마와 내가 북한에서 처음 도망친 것은 1997년이었다.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살면서 배불리 먹어본 기억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옆집 경숙이네도 굶어 죽었고 함흥을 대표하는 '룡성기계공장'에서 노동자 3천 명이 굶어죽은 일도 있었다. 내가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집을 잃고 떠돌이 생활을 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기차 안에서 기차역에 죽어 있는 아이들 시체 수십 구를 본 적이 있었다. 6살도 안 돼 보이는 아이들의 주검이 리어카에 짐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도처에 널린 굶주림과 죽음의 흔적들. 죄없는 아이들이 굶어죽는 이 땅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없었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치다
수용소를 탈출 한 뒤 중국 선양으로 갔다. 그곳에서 만난 한국인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교회에 숨어 지냈다. 밖에 돌아다니다가 중국 경찰에게 걸리면 정말 끝장이었다. 외부와의 철저한 단절만이 생명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가끔씩 창문 밖으로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아이들을 볼 때면 몰래 눈물을 훔쳤다. 마음 놓고 공부하고, 어울려 놀 수 있는 또래 아이들이 부러웠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학교 문턱을 밟아보지 못한 내게 공부는 간절한 바람이었다. 가슴 속에는 항상 배움의 욕구가 꿈틀거렸지만 이를 꾹꾹 눌렀다. 목숨 부지하는 것도 힘든 상황에서 공부는 사치였다. 생존을 위해 처절하게 발버둥칠 뿐이었다.
엄마와 나는 항상 조선족 브로커를 통해 연락을 했다. 엄마는 중국 옌벤에서 미얀마, 태국을 거쳐 나보다 먼저 한국땅을 밟았다. 미얀마에서 강제 북송될뻔 했던 엄마는 그곳에서 큰 고비를 넘겼다고 했다. "꼬레아, 꼬레아"만 밤새 외치며 울부짖지 않았더라면 엄마와 나는 평생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엄마는 항상 내 건강을 걱정했다. 수용소에서 탈출할 때 등골뼈가 부서진 것이 점점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2006년 한국에 둥지를 튼 엄마는 새터민(북한이탈주민) 정착금으로 받은 1천5백만원 중 1천만원을 브로커에게 건넸다. 브로커는 위조 여권과 가짜 서류를 만들어 나를 중국 따이렌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3일 만에 배를 탔고 2006년 인천항에 도착했다.
◆꼭 이루고 싶은 꿈
한국에 도착한 뒤 하나원(북한이탈주민 정착 지원소)에서 3개월간 교육을 받고 먼저 한국에 도착한 외할머니, 엄마와 함께 대구로 왔다. 한국에서 나는 희망을 발견했다. 자신의 의지만 있으면 공부할 수 있는 한국은 내게 '기회의 땅'이었다.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한국에서 북한 초등학교 졸업장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한국과 달리 북한의 초등학교는 4년제였기 때문이었다. 2007년 초·중등 검정고시를 치러 합격한 뒤 곧장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치렀다. 기회는 잇따라 찾아왔다. 피나는 노력 끝에 나는 2008년 2월 서강대 중어중문학과에 합격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행복이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수용소를 탈출하며 부서졌던 등골뼈 때문에 몸이 점점 아파오기 시작했다. 뒤늦게 찾은 병원에서 '척추 압박 골절'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10여년 전에 부서진 뼈를 그대로 방치해 둔 것이 화근이었다. 1년 넘게 병원 신세를 졌지만 좀체 나아지지 않았다. 등을 벽에 기대지 않고 앉아 있을 수 없게 됐고, 제대로 뛰지도, 걷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허리를 누르던 통증이 이제는 목과 머리로 전달돼 바닥에서 뒹굴뒹굴 구른 적도 있었다. 한국에서 희망을 발견했을 때 즈음, 절망이 내 삶을 다시 덮친 것이다.
지난해에 유서를 썼다. 중국어 통역관이 되겠다는 꿈을 이룰 자신도, 고통을 견뎌가며 살아갈 자신도 없었다. 엄마는 내 유서를 발견한 뒤 나를 안고 눈물을 쏟아냈다. "우리가 어떻게,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그리고 엄마와 함께 유서를 갈기갈기 찢었다. 지금은 비록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신세지만 언젠가 이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다시 책상에 앉으려 한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나를 감쌀 때마다 지독했던 북한 생활을 떠올리며 끝까지 견뎌낼 것이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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