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TV 오락프로그램을 들여다보면 감동과 휴먼은 기본이고 시청자가 직접 참여해 기적과 같은 현실을 만들어내는 데 주력하고 있는 추세다. 예를 들어 지난해 케이블TV 사상 엄청난 시청률을 올린 '슈퍼스타 K'의 경우, 전국에 노래 잘하는 아마추어 가수 지망생 수만 명을 제치고 '허각'이라는 환풍기 수리공이 최종 1인이 됐다. 이 소식에 시청자들과 네티즌은 열광했고 평범한 서민도 실력만 있으면 누구나 스타가 될 수 있다는 걸 현실로 보여줬다.
그런데 최근 늦게 귀가해 보니 아내가 TV를 보며 울고 있는 게 아닌가? 무슨 영문인가 들여다봤더니 '스타킹'이란 프로그램에 등장한 야식 배달부 김승일 씨 이야기 때문이었다. 그는 서울 유명대학 성악과에 들어갈 정도로 발군의 실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병간호 등으로 대학을 휴학하고, 10년간 대학 동기들과 연락이 두절된 채 야식 배달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병석에 있던 그의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현재 그의 대학 동기들은 국'공립단체 합창단원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김승일 씨가 대학 동기들과 함께 노래하는 모습에 아내는 물론 나 역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 프로그램을 시청한 후 며칠 동안 내 머리에는 '야식 배달부 김승일'이란 사람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대신 허각이란 친구처럼 감동적인 희망의 스토리로만 내 맘에 남은 게 아니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이 그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상처가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함께 든 것이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야식 배달부 김승일'이란 이름이 포털 사이트에 실시간 검색어 1위를 하고 있었고, 온 네티즌들의 환호와 지지의 글이 도배를 하고 있었다. 그 친구는 앞으로 100일 동안 본격적으로 성악공부를 해 조만간 방송을 통해 다시 우리에게 희망과 감동을 줄 것이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김승일이라는 친구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한풀이를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회성 방송과 시청자들의 순간적인 관심이 사라질 때, 그에게는 뜻하지 않은 상처로 남을 수도 있고, 나중에는 이 프로그램에 나온 것을 후회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부정적인 생각마저 들게 됐다. 그래서 나는 전혀 안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타킹 담당PD에게 용기를 내 전화를 걸었다. 담당PD는 구수한 사투리에 아주 친근한 느낌이었고, 서로 안면도 없는 첫 통화치고는 마음을 쉽게 열 수 있었다. 담당PD 본인도 스타킹의 진행자 강호동 씨와 소주를 마시며 프로그램을 통해 많이 배웠고, 삶의 희망을 갖게 되었노라 이야기했었다고 했다.
며칠 후 나는 김승일 씨와 담당PD를 만나러 방송국으로 갔다. 내가 그에 대해 이토록 관심을 갖는 건 어쩌면 방송과 대중의 속성을 좀 아는 시청자의 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직접 만나본 김 씨의 얼굴에는 깊은 슬픔도 있지만 건강함이 있었다. 그의 꽉 다문 입에선 굳은 의지가 보였고, 그의 눈에선 슬픔을 이겨낸 희망의 빛이 보였다. 그는 100일의 연습을 통해 더욱 성장한 모습으로 TV 화면에 나타나 우리에게 또 한 번의 감동을 선물할 것이다. 스타킹의 역할은 사실 거기까지인 것이다.
그런데 우연일까? 나는 현재 경기도문화의전당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김 씨는 경기도 수원에서 초'중'고교를 다녔고 야식 배달도 수원에서 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100일 후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내 생애 첫 번째 공연'이란 제목으로 김 씨를 위한 생애 첫 번째 무대를 준비하기로 했다. 난 그가 파바로티처럼 늦은 나이에 성악을 시작해 세계적인 성악가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설사 그렇지 않게 되더라도 엄마를 일찍 여읜 한 청년의 맘에 따뜻한 희망과 용기만이라도 생기길 간절히 바란다. 1시간짜리 방송을 통해 시청자들이 원하는 감동과 기적이 만들어졌고 그 감동을 전달받았다면 그 안에 틀림없이 사랑과 관심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것은 감동을 받은자들의 몫이 아닐까 생각된다.
김 씨는 지금 서울에서 일주일에 한 번 레슨을 받고, 나머지 날에는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연습을 한다. 그를 계속해서 지켜본 사람들은 그의 얼굴에 미소가 더 많아졌다고 한다. 느릿하게 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눈시울을 적시던 그의 얼굴과 말이 아직도 떠오른다. "제가 대학 다니면서 휴학 전까지 연습무대에도 한번 못 서봤습니다…."
그의 생애 첫무대가 열리는 날 난 객석에 앉아 있을 것이고, 이사장이 아닌 관객으로서 그의 앞날에 희망과 용기가 함께하길 기도하며 또 많이 울 것 같다. 이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내 눈시울은 붉어진다.
조재현(배우·경기도문화의전당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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