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임은동의 허 씨 일가는 가계 전체가 항일운동에 투신했다. 허위는 위로 3명의 형이 있었는데 요절한 둘째 형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독립투사였다. 당대의 유학자로 허위의 스승이나 다름없었던 맏형 허훈(薰)은 진보 의진의 창의장이었고, 의병 전선에 나선 아우들에게 군자금을 제공했다.
셋째 형 허겸은 허훈과 허위를 도와 의병에 참가했으며, 국권상실 후에는 허위의 유족 등 일가를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다. 허겸은 경학사를 계승한 부민단 단장을 역임하는 등 10여년 동안 남·북만주와 노령 등을 전전하며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허위의 장남인 허학은 21세 약관에 의병에 참가했으며 독립의군부사건 주모자로 활동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중부인 허겸을 따라 만주로 가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다. 허훈의 맏손자인 허종(鍾)도 만주 서로군정서의 독립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했다.
허겸과 함께 만주로 건너갔던 허형, 허필(苾) 등 허위의 사촌형제들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북만주로 이주해 독립운동을 도우다 이역 하늘 아래 뼈를 묻었으며, 그들의 아들들도 만주와 노령을 오가며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허형의 아들 허발과 허규(珪)도 종숙부인 허겸과 재종형 허학 등 친지들과 국내외의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며, 허필의 둘째 아들 허형식(亨植)은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으로 활동하며 북만주 항일투쟁을 주도했다.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육사 형제가 바로 허형의 외손자들이다. 이육사와 형제의 민족의식 형성에는 본가는 물론 외숙인 허규나 외삼종형 허종 등 외가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김교홍 왕산기념관장은 "13도창의군 의병대장 왕산 허위 선생의 집안처럼 대대로 쌓아올린 명문가의 전통과 영화를 국가와 민족을 위해 오롯이 바친 사례는 아주 드문 일로 민족사적 기념비로 청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향래기자 bulsaj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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