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 낙동강 시대] 33] 구미 강정마을<1>

매화를 아내로, 학을 자식으로…매학정의 풍류 낙동강에 흐르고

강정마을 지도
강정마을 지도
숭선교에서 바라본 마을 전경. 뒤에 보이는 것이 옥산.
숭선교에서 바라본 마을 전경. 뒤에 보이는 것이 옥산.

동쪽으로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고, 북쪽으로 옥산(고산)이 나지막이 둥지를 틀고 있다. 서쪽으로 용이 크게 움직여 물길을 바꿔놓았다는 용진들판이 펼쳐져 있고, 남쪽으로 927번 지방도가 지나는 중심에 강정마을이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구미시 고아읍 예강2리 '강정'. 이 마을에는 조선시대 매화와 학을 벗 삼아 풍류를 즐겼던 고산(孤山) 황기로의 삶과 이무기에게 물을 공급해 용으로 승천할 수 있게 했다는 옥산(玉山) 이우의 스토리가 담겨 있다.

조선시대부터 80년대 초까지 물류와 교통의 요충지였던 강정나루터, 뱃길의 안전 운항을 빌었던 배 고사(告祀)의 추억도 오롯이 스며 있다. 주민들은 식수와 생활용수, 농업용수 등 물이 없어 생고생을 한 시절, 1965년 겪었던 물난리의 아픈 기억까지 강정마을 근현대사의 한 조각으로 품고 있다. 강정은 특히 낙동강을 비롯해 물로 인한 애환을 가장 많이 간직한 마을이다.

강정의 마을이름은 낙동강의 '강'자와 매학정의 '정'자를 땄다. 매학정은 고산과 옥산의 향이 서린 곳이다. 조선시대 고산(孤山)의 할아버지, 상정(橡亭) 황필(1464~1526)이 만년에 이곳을 터전으로 삼았다는 기록으로 봐 강정의 역사는 적어도 480년이 넘는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매화를 아내로, 학을 자식으로

'매화나무를 심고 학을 많이 길러 매화를 아내로, 학을 자식으로 삼다.

낙동강을 조망할 수 있는 강정마을 북쪽 야산 기슭, 매학정(梅鶴亭).

고산(孤山) 황기로(1521∼1567)는 '매처학자'(梅妻鶴子)로 불린 중국 송나라 임포처럼 매학정에서 매화와 학을 벗 삼아 살았다. 지금의 구미시 고아읍 대망리에서 태어난 고산은 할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보천산(寶泉山) 기슭에 매학정을 짓고 글씨를 쓰며 평생을 보냈다. 고산의 조부, 상정 황필이 만년에 풍광이 좋은 곳에 휴양지로 터를 잡았다가 손자가 이 터를 이은 것이다.

고산은 일찍이 진사가 돼 여러 번 벼슬에 천거됐으나 나가지 않고 학문과 서도에만 정진해 서예의 대가가 됐다. 특히 초서에 능해 '초서의 성인'으로 불렸다.

고산은 만년에는 사위이자, 율곡 이이의 막내 동생인 옥산 이우와 함께 매학정에서 평생을 시서(詩書)와 금(琴)을 즐기며 시름없이 보냈다고 한다. 매학정은 고산이 죽은 뒤 사위인 옥산의 소유가 됐고, 이후 아들이 없는 고산의 제사는 옥산의 자손들이 받들게 됐다.

매학정 옆에는 또 귀락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학정(鶴汀) 이동명(1624~1692)이 낙향한 뒤 지은 집이다. 학정은 조선시대 영해부사를 지내다 1689년 관직을 박탈당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귀락당에서 자주 소일했다고 한다. 1675년 효종비인 인선왕후 문제로 유배를 갔던 우암 송시열은 학정의 집을 보고 '마지못해 벼슬하다 늙어서는 돌아오고, 돌아와서 즐거워한다'는 내용의 귀락당기를 지었다.

매학정과 귀락당은 이렇게 수백 년 동안 낙동강을 굽어보며 강정마을을 지키고 있다.

◆물이 만든 용, 용이 만든 들판

옥산 이우는 고산과 함께 학문을 닦기 위해 강정마을 서쪽 일리천을 힘들게 건너 매학정을 자주 오갔다고 한다. 옥산은 어느날 매학정 근처 정자나무 그늘 아래에서 낮잠을 자다 지금의 용진들 인근에서 물이 적어 승천하지 못해 버둥대는 이무기의 꿈을 꾸었다. 이상히 여긴 옥산은 꿈에서 깨어나 일리천을 건너가 보니 근처에서 발버둥치는 큰 이무기를 발견했다는 것. 옥산은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 주변에 둑을 쌓고 물어 날라 부어 이무기가 하늘로 올라가 용이 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하늘로 올라간 용은 또다시 옥산의 꿈에 나타나 소원을 물었고, 옥산은'일리천을 건너 매학정에 공부하러 다니기가 크게 불편하다'고 말했다. 그날부터 마을 주변에는 며칠 동안 소나기가 쏟아져 일리천이 범람했고, 결국 일리천 물길이 현재의 감천으로 바뀌는 바람에 옥산이 편하게 매학정을 오갈 수 있었다고 한다. 또 물길이 바뀌기 전의 일리천 자리가 큰 들판으로 변모했는데, 이 들판은 용이 크게 움직여 생긴 들이라고 '용진(龍震)들'이라고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일리천과 감천, 용진들 등에는 옥산과 승천한 용이 물을 매개로 얽혀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강정마을 매학정이 자리한 보천산은 황기로와 이우의 호를 따 지금까지 '고산' 또는 '옥산'으로 불리고 있다.

◆물 고생과 분수원(分水員)

강정은 낙동강에 인접해 있지만, 오랫동안 물 때문에 곤욕을 치른 동네다. 옛날 마을에 우물을 팠지만 왠지 탁하고 물맛이 짜 식수나 생활용수로 사용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낙동강에 나가 양철로 만든 '물지게'로 물을 져 날라야만 했다.

유유분(82) 씨는 "(옥산) 기슭에 우물을 판깨네(파니) 짜(바), 짜바서 아무도 묵을 수가 없었어"라고 말했고, 성정임(72) 씨도 "이 마실에는 샘이 없어가지고, 강물을 오래 져 묵었어. 물이 제일 귀했지"라고 했다.

우물이나 샘이 마땅치 않아 마을 아낙네들은 밤낮 가리지 않고 강에서 물을 날랐다. 강정 사람들은 1950년대 후반까지 이 강물로 쌀을 씻어 밥을 짓고, 소죽을 끓이고, 빨래를 해야 했다.

그러던 중 50년 대 말 사과 과수원이 하나 둘 생기면서 관정 펌프를 통해 지하수를 퍼 올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주민들은 강까지 나가지 않고 이웃 과수원에서 물지게로 물을 얻어다 생활했다. 그러나 과수원은 3, 4집에 불과해 주민들의 식수나 생활용수를 모두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귀한 물 때문에 과수원 주인과 물을 길어 나르는 주민들 간 마찰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성정임 씨는 "과수원에 가서 펌프질 그거 해가지고 자주 하니깐 펌프 닳는다고 머라 카지. 자꾸 푸러 간께, 샘 없는 사람들이 얼매나 마이 오노. 마음 상한 일도 많았다니깐"이라고 했다.

물이 귀한 강정에서는 수리계(현 수자원공사) 소속으로 마을에서 주로 선임됐던 '분수지기'(분수원)가 하나의 권력이었다. 분수원은 농부들이 날짜를 나누어 모를 심어 놓으면 때를 맞춰 양수장에서 물을 공급해주는 역할을 했다.

이장수(80) 씨는 "분수지기라고, 물 배급했던 사람이 이 수로에 좀 주고, 저 수로에 좀 주고 이래 했어. 분수(지기) 허락 없으면 물 못 댄다 한께. 딱딱 지정해주거든. 오늘은 누구 논, 내일은 누구 논, 이래 지정을 해주거든"이라고 말했다.

논에 물대기가 어려웠던 시절, 농부들에게 가장 대접을 받았던 사람들이 바로 분수원이었다. 농부들은 모 심을 때가 되면 분수원들을 집에 초대해 식사와 술을 대접하기도 했단다.

분수원을 했던 임우봉(77) 씨는 "내가 분수지기 했거든, 여기 수리계에서. 이 논에 모 심으만 (물) 내라주고, 다시 저 논에 내라주고. 분수지기가 자리를 비우면 대어놓은 물을 허락도 없이 자기 논으로 빼가기도 한 기라"고 말했다.

분수원들은 65년 강정 인근 낙동강 제방을 재보수하고, 수로를 새로 만들면서 역할이 줄어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됐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공동기획:매일신문·(사)인문사회연구소

◇마을조사팀 ▷작가 이가영·김수정 ▷사진 박민우 ▷지도일러스트 권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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