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는 김민서(가명·15) 양은 초등학교 6학년 무렵부터 화장을 시작했다. 책가방 안에는 파우더와 립글로스, 마스카라 등이 든 작은 화장품 파우치를 넣고 다닌다. 이제는 아이라인 그리는 것쯤은 식은죽먹기. 스모키 화장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민서가 화장을 시작한 것은 친구들이 하나 둘 화장을 시작하면서부터다. 민서는 "요즘 중학생들에게는 화장이 자연스러운 일이 돼 버렸다"며 "화장품이나 화장법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어야 대화에 낄 수 있다"고 했다.
민서처럼 이른 나이에 화장을 시작하는 10대가 늘어나면서 화장품 업계도 이에 주목하고 있다. 화장품업계는 10대를 타깃으로 한 브랜드들을 잇따라 선보이면서 틴에이저 시장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10대 화장을 보는 두 가지 시선
박지연(가명·16) 양은 엄마가 중요한 모임이 있는 날이면 화장을 대신해준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화장을 잘 하지 않다보니 화장술이 영 어색한 엄마에 비해 지연 양은 아주 능숙하게 화장을 하기 때문이다. 가느다랗게 아이라인을 그린 후 뷰러로 속눈썹을 집어올리고, 마스카라를 바르는 것까지 깔끔하게 해 낸다. 엄마는 이렇게 화장이 너무 능숙한 딸이 걱정이지만, 지연이는 오히려 화장에 영 관심이 없는 엄마가 더 답답하다. 지연 양은 "요즘 사회는 외모도 경쟁력인데 예쁘게 꾸미는 것이 뭐가 나쁘냐"며 "화장법은 틈틈이 인터넷이나 잡지를 보고 공부한다"고 했다.
요즘은 길을 가다보면 화장을 한 10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앳돼 보이는 얼굴이지만 스모키 메이크업 등 짙은 화장을 한 청소년들도 눈에 띈다. 최근의 한 통계에 따르면 15세에 메이크업을 시작한 학생이 23.8%로 가장 많았으며. 많이 사용하는 메이크업 제품은 립글로스, 파우더, 메이크업 베이스, 마스카라 순이었다. 김주민(15) 양은 "친한 친구 7명 중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화장을 한다"며 "학교갈 때 화장을 하는 일은 거의 없고, 외출할 때만 하는 화장이기 때문에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본다"고 했다.
이런 화장에 대한 관심은 비단 여학생들만의 일은 아니다. 남학생들 역시 화장과 피부미용에 관심이 많다. 비비크림을 바르고 펜슬로 아이라인을 그려 눈매를 또렷하게 하는 정도의 화장을 즐긴다는 이준현(16) 군은 "여자친구가 화장하는 것을 좋아해 이것저것 알려주다보니 자연스레 화장을 시작하게 됐다"며 "예전에는 '좀 논다' 하는 날라리나 화장을 한다고 생각했었지만 요즘은 워낙 화장하는 친구들이 많아 화장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고 했다.
화장하는 자녀들을 지켜보는 부모들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다. 김선희(42) 씨는 "우리 때는 대학에 입학해도 화장하는 친구들이 많지 않았는데 요즘 아이들은 너무 일찍부터 겉멋만 중시하는 것 같아 그리 좋아보이진 않는다"며 "딸에게 '깨끗한 피부 그대로가 더 예쁘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엄마는 고리타분하다'고만 답을 하니 답답하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10대들의 화장이 워낙 보편화하다보니 부모들도 어쩔수 없이 져주는 분위기가 됐다. 박정훈(44) 씨는 "한동안 화장하는 문제로 애와 엄마가 그렇게도 싸우더니 학교 갈 때는 화장품을 가지고 가지 않는다는 선에서 타협을 한 것 같다"며 "요즘은 아이가 혹시나 질 나쁜 화장품을 써 피부에 문제나 생기지 않을까 싶어 오히려 애들 엄마가 직접 딸아이의 화장품을 골라주는 분위기"라고 했다.
◆화장품 업계 블루오션으로 급부상
업계는 10대 화장품 시장을 연간 2천억원대 규모로 보고 있다. 게다가 매년 20% 이상씩 성장하는 블루칩으로 급부상 중이다. 이 때문에 화장품 회사들이 신학기를 맞아 10대 청소년들을 겨냥한 화장품을 잇따라 내놓으며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더구나 예전에는 저자극·여드름 예방을 위한 기초화장품에 집중됐다면 지금은 가벼운 메이크업을 즐기는 10대 청소년이 늘어나면서 그 시장성이 더욱 넓어졌다. 10대들이 선호하는 캐릭터를 활용한 화장품부터 책가방에 휴대하기 좋은 소용량 제품 등 무궁무진한 상품화가 가능한 것.
현재 10대 화장품 시장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존슨앤존스(클린앤클리어), 애경(에이솔루션), LG생활건강(나나스비), 한국멘소래담(아크네스) 등 선발 업체에서부터 아모레퍼시픽(틴클리어), 유한킴벌리(티엔), 투쿨포스쿨(too cool for school) 등이 10대를 타깃으로 하고 있다. 이 밖에도 에뛰드하우스, 아모레퍼시픽 아리따움, LG생활건강 뷰티플렉스 등 독자적인 유통망을 갖춘 화장품 대기업들 역시 10대를 위한 별도의 판매망을 확대해 나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들 업체들은 소녀시대, f(x),샤이니 등과 같은 아이돌 모델을 내세우는 한편 10대 취향에 맞는 캐릭터에서부터 연필, 파스텔 등 학용품을 디자인에 적용한 이색 화장품들을 통해 소비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기성 화장품들이 미백과 수분관리, 주름관리 등 기능성에 초점을 뒀다면 10대의 화장 포인트는 한듯 안 한듯 티나지 않는 포인트 메이크업이다. 이 때문에 이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제품은 화장한 티가 나지 않으면서도 피부 잡티를 커버해주고 피부 톤까지 밝혀주는 비비크림. 또 반짝거리지 않고 입술 톤을 밝혀주는 립틴스 역시 10대들에게 사랑받는 메이크업 제품이다.
◆화장은 아이돌 영향?
10대 사이에 화장이 만연한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10대 아이돌 그룹 연예인들의 영향이 크다고 분석한다. 10대들은 자신들이 우상으로 꼽는 아이돌의 모든 것을 따라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특히 요즘은 어린나이부터 활동하는 또래 연예인들이 많아지면서 평범한 아이들 역시 이런 모습들을 흉내내는 심리가 더욱 강해졌다는 풀이다. 박나연(가명·14) 양은 "아이들 사이에서는 특히 연예인 화장법을 따라하는 것이 유행"이라며 "하지만 연예인을 흉내내기 위해 화장을 시작하기보다는 친구 중 한두 명이 화장을 시작하면 이것이 다른 친구들에게로 퍼져나가는 것이 일반적이다"고 했다.
저가 화장품이 홍수를 이루면서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10대가 용돈으로 구매할 수 있는 화장품이 다양해진 점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몇 천원의 가격으로도 화장품을 구매할 수 있게 되면서 화장품을 사는 일이 부담스럽지 않게 된 것. 게다가 굳이 로드숍까지 가지 않아도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화장품을 꼼꼼하게 비교해보고 구매할 수 있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됐다. 주로 온라인 쇼핑몰을 통해 화장품을 구매한다는 이보람(가명·15) 양은 "일단 가격이 싼 제품을 우선하지만 사용 후기를 살펴보고 믿을 만한 제품만 구매한다"며 "요즘은 워낙 10대 전용 화장품 종류가 다양해서 꼼꼼한 비교가 필수"라고 했다.
인터넷을 통해 손쉽게 화장법을 배울 수 있는 것도 화장하는 10대가 늘어나는데 일조했다는 분석이다. 과거에는 고작해야 잡지를 사 보는 것이 전부였지만 요즘은 인터넷을 잠시만 검색해도 화장품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사용법까지 동영상으로 보여주는 블로그들이 부지기수다. 게다가 10대들은 화장을 한 모습을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찍어 또래 친구들과 공유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길 정도이다.
◆10대 화장은 독성 칵테일을 흡수하는 것
하지만 전문가들은 너무 일찍 화장을 시작할 경우 피부에 해롭다고 경고하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는 10대 소녀들이 화장할 경우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충격적인 연구결과를 내놨다. 미국 워싱턴 DC 소재 환경연구단체인 환경실무그룹(EWG)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10대 소녀들이 메이크업에 신경 쓴다는 것은 암, 불임, 심각한 호르몬 장애 등과 관련된 '독성 화학물질 칵테일'을 흡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는 것이다. 실험결과 14~19세 소녀 모두 화장품 제조에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물질인 프탈레이트, 트리클로산, 파라벤, 사향 같은 독성 화학물질에 오염돼 있었는데, 이는 암·호르몬 장애와 연관이 있으며 일부에서는 우울증·성조숙증과 연관있는 물질이라는 주장도 있기 때문이다. EWG는 "메이크업을 시작하는 연령이 어릴수록 위험은 커진다"며 "뇌와 몸이 아직 성장 중이어서 화학물질의 독성에 더 취약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10대의 피부는 아직 성장기에 있기 때문에 작은 자극에도 쉽게 피부손상을 초래할 수 있어 화장품 사용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여드름이 난 상태에서 메이크업을 하는 것은 모공을 막아 피부 트러블을 더욱 심하게 하고, 마스카라나 아이라이너의 과도한 사용은 자칫 시력이 떨어지는 등 부작용을 초래하기 쉬워 가급적 사용을 자제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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