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끼는 제자로부터 예술에 관한 많은 의문과 고민이 담긴 메일이 왔다. 내용은 좋은 그림과 나쁜 그림의 기준을 어디서 찾아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자신이 좋아서 그리는 그림이 주변 사람들에겐 미의 기준에 어긋나 나쁜 그림으로 보인다면, 그냥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그리는 게 옳은지 혼란스럽다고 했다. 그렇다면 예술가의 사회적 책임은 어느 지점에 세워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고도 했다.
나는 우선 무엇보다도 내면의 진실한 소리를 좇아가는 게 좋은 그림을 그릴 가능성이 높을 거라고 대답해 주었다. 누구나 알아볼 수 있다는 이유로 눈에 비치는 대로 그리는 것보다 마음의 느낌으로 그리는 것이 창조와 소통하는 상상력과 맞닿아 있다고 말해 주었다. 감성이 있다 해도 고민 없는 묘사는 상상력과 비전의 문제에서 한계에 부딪히고, 사유는 있다 해도 감동이 없는 추상도 공허하기는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창조란 눈에 보이는 현상들을 넘어 새로운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실 예술은 익숙하게 보이는 것들에 적응된 사람들에겐 처음에는 이상하게 보이거나 아예 가려져 외면되기 일쑤다. 천재들에겐 몰이해와 냉대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문화지수와 경제지수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예술가의 사회적 책임을 예술이 특별하다는 오해로 전제하지 말고, 한 사회의 집단생활 속 역할 분담에서 찾아보면 어떨까.
좋은 그림과 나쁜 그림은 대중의 기호와 취향이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원하는 쪽으로 타협할 것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 스스로 예술정신의 울림에 얼마나 솔직하고 진지하게 반응했느냐에 달려 있다. 그 다음 문제가 그것을 대중들에게 이해시키는 일에 얼마나 노력했으며, 궁극적으로 소속 사회의 문화의식을 조금씩이라도 진전시켰느냐에 따라 좋은 예술가의 사회적 책임도 수행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가는 여전히 가난하거나 힘들게 살아야 하는가? 역사상 대부분 예술가들은 그 길을 기꺼이 걸어갔다. 지금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그들은 예술을 고민했다. 경제적 여건이 월등히 나아진 요즈음은 웬일인지 먹고사는 일을 더 걱정한다. 게다가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이길 갈망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남들처럼 성공하며 지극히 평범한 무리 속에 편입되겠다고 일생을 허비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지금 예술의 언저리를 맴돌며 고민하고 방황하는 이들 모두가 정신세계를 진전시키는 고난을 감내하고 말고는 결국 순전히 자기 자신의 몫이다. 설혹 자신의 내면의식과 사유가 가능한 지점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해답은 일생을 걸고 행할 수 있는 신념과 용기에 달려 있다.
이영철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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