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일이다. 당시 정부는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 시설(방폐장) 부지 선정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1990년대부터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격렬한 주민 반대에 부딪혔다. 2003년 전북 부안에서는 심각한 소요 사태로 치안이 마비되기도 했다.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자 정부는 한국수력원자력 본사 이전과 수천억 원대에 이르는 주민 지원 사업 등 인센티브를 내걸었다.
분위기는 역전됐다. 경북 경주, 영덕, 포항, 전북 군산이 유치에 나서 자치단체를 중심으로 총력전을 벌였다. 4개 도시였지만 외형적으로는 경북과 전북이라는 영호남의 대결이었다. 선정일이 다가오자 고질적인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현수막이 붙고 온갖 소문이 떠돌았다. 그러나 경주로 부지가 선정되자 모두 일상으로 돌아갔다. 탈락한 곳의 섭섭함이 없지 않았겠지만 결과에 승복한 것이다. 그 뒤 경북과 전북의 관계가 악화하거나 경북의 세 도시가 반목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신공항 부지 선정 문제로 시끄럽다. 대구'경북, 울산, 경남 일부와 부산의 대립 때문이다. 자치단체장과 시민, 지역 국회의원이 유치에 적극 나서고 있다. 신공항에 지역의 미래가 걸려 있으니 당연하다. 위험한 방폐장도 인센티브의 매력 때문에 유치전이 심했는데 이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이점이 있는 공항 건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약한 셈이다. 문제는 이를 이용하려는 정부와 일부 정치권, 서울 언론이다. 지역 간 대립을 빌미로 신공항 건설 문제를 백지화하려는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주무 부처 장관과 고위 당국자의 잇단 3월 발표 확언에도 부지 선정 연기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이에 맞춰 일부 정치인은 아예 공항 건설 백지화를 주장하고, 서울 언론도 이에 동조하고 있다.
외견상으로는 심각한 지역 간 대립 문제와 경제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신들의 이익과는 아무 관련이 없으니 철저하게 무관심하다. 엄청난 건설 경비에 대한 국가 재정 부담을 거론하지만 그 뒤에는 천문학적인 액수를 지방을 위해 투자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 숨어 있다. 다만 이해관계 때문에 대구'경북이나 부산과 척을 질 수는 없으니 마치 원론적인 이야기인 양 무용론을 들먹이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대통령이 약속하고 경제성도 확인한 국책 사업에 딴죽을 걸 이유가 없다.
그들의 주장처럼 경쟁력 확보와 경제성 문제라면 모든 국책 사업을 수도권에 집중하면 된다. 지방에 혁신도시를 건설하고 정부 부처를 이전할 이유가 전혀 없다. 반면 방폐장이나 원전을 비롯한 지역에 흩어져 있는 각종 위험 시설도 수도권으로 옮겨야 한다. 지역이 이것들을 끌어안고 가야 할 이유가 없다. 지역 갈등은 더욱 설득력이 없다. 이는 지역민의 건전한 상식과 합리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방폐장 때도 나타났듯 지역민은 지역에 이익이 되는 국책 사업 유치를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리고 객관적이고 공정한 심사 결과라면 마땅히 승복할 것이다. 정치권과 서울 언론은 더 이상 지역민을 앞뒤 가리지 못하고 집단 이기주의에 매달려 있는 어리석은 사람들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
더 큰 문제는 정부의 태도다. 부정적인 여론을 빌미로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려는 것이다. 정치적 부담으로 약속을 깨기가 어렵자 뒷전에서 이러한 여론을 조장하는 듯한 의심도 든다. 약속이나 한 듯 공항 건설 백지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경주와 울진이 왜 지난 수십 년 동안, 그리고 앞으로도 원전과 방폐장을 끌어안고 가야 하는가? 왜 각종 환경오염 시설이 지방에 밀집해 있는가? 이 시설을 수도권에 설치하려 했다면 그 지역은 물론 수도권 전체가 반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역의 현실은 이러한 위험 부담을 떠안아야 할 정도로 처절하다. 신공항도 이와 같다. 그만큼 지역 발전의 절절한 열망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를 외면하고 방해하는 것은 이 지역과 등을 돌리겠다는 것과 같다. 정부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앞으로 어떤 국책 사업도 강력한 반발에 부딪힐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鄭知和(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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