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순국(自靖殉國)은 나라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다. 일제의 침략이 왜 부당한지를 생명을 던져 증명하는 선명한 항쟁이다. 일제에 저항하는 가장 극단적인 투쟁방략이다.
나라가 망하던 무렵, 온 나라에서 목숨을 끊은 순절자는 90명 정도였다. 2010년 현재까지 행적이 증명되어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인물은 61명. 그 중에서 경북 출신 순국자는 18명으로 확인되었으며, 안동을 비롯한 북부지역 인물이 13명에 이른다. 1940년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자결한 사람까지 포함하면 14명이다.
안동문화권을 중심으로 한 경북에서 가장 많은 자정순국자들이 등장한 것은 퇴계학맥을 배경으로 한 위정척사론, 그리고 대의명분과 의리정신이 어느 지역보다도 강한 특성에서 나온 것이다.
◇경북지역 자정순국의 서막을 연 이건석·김순흠
일제의 침략에 죽음으로 항거한 경북인 제1호는 김천 출신 이건석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유생들을 이끌고 궁궐 앞에 나아가 조약의 폐기와 친일매국노들의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항쟁을 거듭했다. 일본헌병사령부에 감금된 그는 1906년 5월 옥중에서 피를 토하며 분사했다.
1895년 단발령 직후 의병에 참가하며 항일투쟁에 나섰던 김순흠(안동)이 자정순국의 길을 택한 것은 왜적에게 세금을 바치는 땅에서 나온 곡식과 과일을 모두 인정할 수 없고 입에 넣을 수도 없어서였다. "국권을 회복하는 날까지 제사상에도 음식을 올리지 말라"고 한 그는 1908년 9월 단식 23일째 세상을 떠나면서 안동문화권에서 나온 첫 자정순국자로 기록되었다.
◇순국의 물결을 이루어낸 향산 이만도
향산 이만도는 경술국치에 항거해 단식 순국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만도의 자정순국이 커다란 파장을 몰고온 것은 그의 혁혁한 문벌과 관력 때문이다. 그는 퇴계의 11대 손으로 명문가의 후손이며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삼사 등 청요직을 두루 거친 전통 관인출신이다.
임오군란이 발발하기 두 달 전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에 내려온 그는 한동안 기울어가는 국운을 자책하며 선대의 묘역을 전전하면서 은둔과 고행의 여정을 보냈다. 나라와 황실 그리고 조상에 대한 죄인을 자처한 것이다.
을미사변의 비보에다 단발령이란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을 때는 선성의진을 결성해 항일전을 선도했으며,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5적 처단과 조약 파기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경술국치는 그의 존재이유에 치명타를 가했다. 오욕과 수치가 점증하는 가운데서도 그를 살아있게 만든 것은 국권회복에 대한 일말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경술국치는 그 최소한의 희망마저 없애버렸다.
일제가 온 나라를 집어삼킨 상황에서 원수의 백성이 되기를 거부하는 방법은 자진(自盡)뿐이었다. 국가(국왕)에 대한 충절과 가문에 대한 자존이 완전히 붕괴된 그에게 죽음은 숙명이었다. 국치로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암흑 속에서 필연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극단적 출구였다.
이만도는 24일간의 단식으로 자정순국했다. 경술국치라는 비극적 역사 앞에서 스스로 책임을 통감하며 결행한 그의 자결은 당대와 후인들에게 커다란 유훈이 되었다. 이만도의 죽음이 임박할 무렵 삼종질이며 함께 의병을 일으켰던 이중언이 단식에 들어가 27일 만에 순국했고, 그의 문인이었던 의병장 김도현이 동해바다에 몸을 던짐으로써 스승의 뒤를 이었다.
아들 중업과 며느리 김락 그리고 손자 동흠·종흠 형제 등 일가가 모두 독립운동의 고행에 나섰다. 박민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대한제국의 일면을 상징할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었던 이만도가 미증유의 국치에 극단적인 죄책감을 느끼고 이를 책임지기 위해 자결 순국한 것은 커다란 역사적 귀감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대를 이은 순국 류도발·류신영 부자
안동 하회에서 태어난 류도발은 서애 류성룡의 후손으로 1910년 나라가 무너지자 조상의 묘소를 찾아 하직 인사를 한 후 음식을 끊었다. 단식 17일째 저녁 무렵 그는 손수 몸을 깨끗이 씻고 자리에 바로 누워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간결하게 치르고 명정(銘旌)에 대한처사(大韓處士)라 적으라 했다. 벼슬하지 않은 선비였지만 서애의 후예답게 나라의 위기를 맞아 충절을 실천한 것이다. 무너지는 나라와 함께 스러져가는 아버지를 지켜본 류신영은 충북 보은의 속리산 자락에 옮겨 살았다.
1919년 1월 고종 황제가 독살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아들을 서울의 인산에 참가시키고 자신은 아버지의 뒤를 잇기로 결심했다. 고종 황제 장례일인 3월 3일 저녁 무렵 류신영은 '우리 땅에서 나는 명주와 삼으로 소박하게 장례를 치르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정순국했다.
◇도해순국(蹈海殉國) 의병장 김도현
'이제야 죽는데 어느 곳에 죽을까, 옛나라는 남은 강토가 없구나, 노중연이 죽은 지 수천 년이 되었건만, 밝은 달은 오히려 빛나는도다.'(晩死死何地 舊國無餘疆 魯連數千載 明月猶有光)
김도현이 바닷속으로 사라져가기 닷새 전인 1914년 동짓달 초이튿날 장손 여래(礪來)에게 남긴 글이다. 왜적의 세상이 되어버린 이 강산에는 죽어서도 묻힐 곳이 없다는 통한과 노중연(魯仲連·불의한 세상에 사느니 차라리 바다에 뛰어들려 한 중국 제나라의 선비)의 고사를 인용한 비장한 각오가 서려있다.
영양지역의 유생 김도현은 국망의 위기에는 의진을 일으켜 전기 의병으로는 가장 늦게까지 항쟁을 벌였고, 신교육기관을 설립해 계몽운동에도 앞장섰던 인물이다. 나라가 망하자 도해(蹈海)라는 방식으로 자결 순국했다.
경술국치를 당하고 안동의 이만도가 단식 순국하자 그 또한 스승의 길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부친의 장례를 마친 그는 망국의 선비로서 자신을 길을 떠나겠다는 영결의 글을 남기고 동해 바다로 향했다.
김도현은 영양에 들렀다가 태백산맥을 넘어 영해 대진 앞바다로 갔다. '동짓날 동해에서 죽어 왜적을 기어코 멸망케 하리라'는 다짐대로 그는 동짓달 새벽에 바다로 걸어 들어가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다.
◇순국대열을 이어간 경북인들
이만도가 순국하기 하루 전 권용하가 순국했다. 종제로부터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이현섭도 21일간의 단식 끝에 순국했고, 봉화 출신의 이면주는 왕족이자 관직을 지낸 사대부로 음독 자결했다.
성주 출신인 장기석은 일왕의 천장절 행사 참석을 거부하다가 강제로 끌고 가려는 일경을 목침으로 때려 중상을 입혔다.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자 옥중에서 단식으로 투쟁하다가 순국했다. 흥해 출신으로 청하·청송·영천·의성 등지에서 의병항쟁을 벌이던 의병장 최세윤도 옥중에서 단식투쟁 끝에 순국했으며, 군위 출신 박무조는 경술국치의 통한을 품고 동해바다에 투신했다. 칠곡 출신인 유병헌은 일제에 저항하며 납세를 거부하다 대구 감옥에서 단식 끝에 숨졌다.
경북인의 잇따른 순절은 장렬했다. 1940년 창씨개명에 반대해 순절한 안동사람 이현구는 그 행렬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퇴계의 후손인 그는 '성씨도 없는 세상 살아 무엇하리'라는 말을 던지고 단식에 들어가 36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조향래기자 bulsajo@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정진호의 매일내일(每日來日)] 3·1절에 돌아보는 극우 기독교 출현 연대기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김세환 "아들 잘 부탁"…선관위, 면접위원까지 교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