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륙도를 떠난 사오정이 삼팔선을 넘었다.'
우리나라 직장인들이 겪고 있는 고용불안을 풍자한 말로 오륙도는 '56세까지 직장에 남아 있으면 도둑놈', 사오정은 '45세 정년', 삼팔선은 '38세까지 버텼으면 선방'을 뜻한다. 직장인들이 몸으로 느끼는 체감 정년은 갈수록 단축되고 있다. 요즘에는 체온에 빗대 체감 정년이 36.5세라는 말이 나돌고 있다. 심지어 '삼초땡'(삼십 초반에 땡)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평균수명이 길어지면서 대비해야 하는 노후기간은 늘어나는데 직장에 다닐 수 있는 기간은 오히려 짧아지고 있다. 살아 남는 것이 직장인들의 최대 과제. 직장마다 생존의 몸부림이 펼쳐지고 있다. 최근 취업포털 사람인이 직장인 2천32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97.8%가 처세술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직장에서 처세술을 활용하고 있다고 응답한 직장인도 54.5%에 달했다. 직장인들의 처세술 백태를 들여다 봤다.
◆입속의 혀처럼 행동해라
직장인 처세술하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이 아부다. 김모(43) 씨는 최근 부서 회식 자리에서 상사의 썰렁한 농담을 듣고 "부장님 대단하십니다. 그런 유머 감각을 유지하고 계시는 사실이 놀랍습니다"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김 씨의 말에 회식자리에 있던 동료들도 모두 맞장구를 쳤다. 직장인들 모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으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루에도 몇 번씩 내뱉어야 하는 직장생활의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업무능력 못지 않게 대인관계를 중시하는 한국의 기업 문화 속에서 상사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고 있다. 취업포털 커리어가 올 1월 직장인 76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1%가 인사평가 전에 아부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아부 방법(복수응답)으로는 ▷커피나 음료를 챙겨준다(29%) ▷재미없는 말도 경청하며 크게 웃어준다(27.8%) ▷평소보다 일찍 오고 늦게 퇴근한다(26.2%) ▷상사의 의견에 무조건 따른다(25.8%) ▷업무능력을 추켜세워준다(25.0%) ▷상사의 대소사를 챙긴다(17.5%) ▷외모나 패션에 대해 칭찬한다(16.7%) ▷상사의 배우자나 가족에게 잘한다(11.5%) 등이 꼽혔다.
◆동문 명단부터 손에 넣어라
한국 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진 것이 학연이다. 특히 출신 고등학교는 인맥 형성에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대기업에 다니는 박모(43) 씨는 직장 내 여러 모임에 가입돼 있다. 취미 활동을 위해 가입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학교 관련 모임이다. 여러 모임 가운데 그가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은 단연 고교 동문회다. 전체 동문 모임뿐 아니라 동기 모임이 열리는 날이면 만사를 제쳐두고 참석한다. 직장 내 든든한 후원자를 만들 수 있고 다양한 정보도 수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는 특정 고교 출신들이 회사 내 실세로 부상하면서 한동안 등안시 했던 중학교 모임도 열심히 챙기고 있다. 비록 출신 고교는 다르지만 같은 재단 중학교를 나온 사실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다. 박 씨는 "신입사원 때는 출신 학교가 중요한지 몰랐다. 나이를 먹고 승진을 해야 하는 입장이 돼 보니 학연이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절실히 깨달았다. 끌어주는 선배가 없는 신생 고교 출신들은 남들보다 몇 배 노력해도 표가 잘 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유난히 학연을 많이 따지는 우리의 직장 문화는 설문조사를 통해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지난해 취업포털 사람인이 직장인 1천595명을 대상으로 '사내 파벌 존재 여부'에 대해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33.8%가 '학연에 따른 파벌'이 있다고 대답했다. 반면 '지역에 따른 파벌'이 존재한다고 답한 응답자는 13.8%에 그쳤다.
◆종교도 중요한 처세 수단이다
현 정부 들어 소망교회 출신 인사들이 요직에 발탁되면서 '소망교회 라인'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소망교회 라인의 부상은 종교가 중요한 처세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벤처기업 경영관리 이사로 재직 중인 김모(44 ) 씨는 지난해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했다. 그는 학창 시절 불교 동아리 활동을 할 정도로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등산을 가면 꼭 절에 들러 공양을 드릴 만큼 불심이 강했다. 하지만 그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기독교인이 됐다. "회사 대표가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평소 회사에서도 신앙 생활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한다. 경영관리를 책임지는 사람으로 회사 분위기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회사뿐 아니라 제 자신을 위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개종을 했다"고 설명했다.
종교 처세술은 직장이 특정 종교에 소속돼 있을 경우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오랫동안 무신론을 고수했던 서모(40) 씨는 최근 종교에 귀의했다. 종교 재단이 설립한 회사에 다니는 까닭에 종교를 갖는 것이 직장 생활에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서 씨는 "종교 재단에 소속돼 있다 보니 종교를 갖거나 개종을 하는 동료들이 많다. 개종에 대해 곱지 않는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지만 현실을 생각하면 나무랄 것도 못된다. 직장생활은 현실이고 종교 생활은 이상이다. 먹고 살기 바쁜 직장인들에게는 이상보다는 현실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상사에 절대 충성…예스맨
직장인들이 많이 선택하는 또다른 처세술은 부당한 지시에도 소신껏 '노'라고 말하기보다 '예스'라고 외치는 순종이다. 특히 직급이 높아질수록 많이 발견되는 처세술이어서 후배들로부터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높은 자리에 오르면 다 저렇게 되냐"는 비아냥을 듣기 쉽상이다.
중견기업에 근무하는 박모(49) 부장은 자신을 바라보는 후배들의 시선이 예전 같지 않음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그는 부당하다고 판단되는 일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노'라고 말해 따르는 후배들이 많았다. 하지만 부장이 되면서 후배들과 분위기가 서먹서먹해졌다. 지난해 임금 인상을 둘러싸고 노사 갈등이 발생했을 때 사측 입장에 서서 후배들을 설득하는 일을 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는 "관리자로서 해야 할 일이 있고 관리자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사측 입장에 서야 하는 애환도 있다. 직장생활에는 복잡한 현실이 있다는 사실을 후배들이 알아주었으면 한다"고 했다.
◆눈치 100단…얌체형
어느 조직이든 손해보는 짓은 하지 않는 약삭 빠른 사람들은 존재한다. 처세술의 달인이라 불리는 얌체형이다. 이들은 남들보다 한 박자 빨리 사내 정보를 입수한 뒤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해 자신의 잇속을 챙긴다. 직장에서 성공한 사람 중에는 얌체형이 많다는 조사결과가 있다. 2008년 연봉전문사이트 오픈샐러리와 리서치 전문기관 엠브레인이 직장인 1천539명에게 '성공가도를 달리는 사람들의 처세술 유형'을 물은 결과, '눈치 빠르고 물정에 밝아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게 있으면 어떻게든 잇속을 차리는 얌체형'(34.1%)이 1위에 올랐다. 이어 '매사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햄릿형'(16.8%) '사람 좋다는 얘기를 듣지만 최소한의 이익을 차리는 허허실실형'(14.6%) '무조건 원칙대로 밀고 나가는 정면돌파형'(11.2%) 등의 순이었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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