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규리의 시와 함께] 우두커니(박형권)

 겨울 상추 좀 먹어야겠다고 지푸라기를 덮어둔 산 아래

밭에

 상추 어루만지러 어머니 가시고

 빵 딸기우유 사서 뒤따라 어머니 밟으신 길 어루만지며

가는데

 농부 하나 밭둑에 우두커니 서 있다

 아무것도 없는 밭 하염없이 보고 있다

 누굴 기다리는 것일까

 아무것도 없는 밭에서 서 있을 줄 알아야 농부인 것일까

 통 모르겠다

 뭐 어쨌거나

 달이 지구를 어루만지듯 우주가 허공을 어루만지듯

 뭘 어루만지고 있다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어루만지는 경지라면

 나도 내 마음속에 든 사람 꺼내지 않고 그냥 그대로 두고

서 있고 싶다

 그냥 멀찍이 서서 겨울 밭처럼 다 비워질 때까지 그 사람

의 배경이 되는 것으로

 나를 어루만지고 싶다

 앞으로는

 참을 수 없이 그대를 어루만지고 싶으면

 어떤 길을 걷다가도 길 가운데 사뭇 서야겠다

 상추 한 아름 받쳐 들고 내려오며 보니 마른 풀도 사철

나무도 농협창고도

 지그시 지그시 오래 서 있었다

  -필자 임의로 약간 줄였음-

아무리 긴 시라도 이런 시는 한 번쯤 보여드리고 싶다. 이런 시 앞에서 우두커니 서 계시게 하고 싶다. 말할 수 없는 간절한 그리움 속절없이 키워 마음에 담은 사람들. 우두커니 정말 우두커니 설 수밖에 없겠다. '우두커니' 속에 얼마나 많은 견딤과 소원의 내용이 찰지게 다져졌는지 아시겠는가. 나도 이 시를 읽고 난 뒤 길을 가다가 우두커니 서는 버릇이 생겼다. 그렇듯 먼 당신 역시 나에게 우두커니일 것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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