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논단] '위험 사회' 시대의 행정 근대화

11일 일본 동북부를 강타한 지진으로 인해 엄청난 사상자와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이메일로 일본인 친구들과 안부와 위로의 메시지를 교환하면서 일본 국민과 행정관료들의 침착함과 관리 능력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1990년대 중반 서울에서 서울대와 도쿄대의 교수들이 두 나라 행정을 비교하는 세미나가 있었다. 당시 일본 행정학의 대가인 니시오 교수가 "일본에서 행정 부패는 없다"고 단언했다. 이 말에 한국 학자들은 놀라움과 동시에 속으로 '설마 그럴 리가 있을까'하는 의아심이 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대장성(大藏省) 소속 공무원들이 산하의 한 공기업 임원들로부터 저녁식사를 대접받았다고 해서 일본의 언론과 사회에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마침 해당 공기업의 정책실패가 도마 위에 올랐던 때였다. 대장성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직후인 1884년에 창설되어 한 세기가 넘도록 일본에서 정부 주도의 국가 발전을 이끈 핵심 행정기구다.

이 사건이 촉발 기제로 작용하면서 대장성을 비롯하여 일본인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경외해 오던 행정관료제의 능력과 공정성에 대한 실망과 불신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2001년 벽두에 이른바 하시모토 행정개혁안에 따라 대장성을 비롯하여 다수의 성청(省廳)을 통폐합하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단행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이 일을 계기로 한국 학자들이 이보다 몇 년 앞서 니시오 교수가 언급했던 내용을 얼마간 이해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우리나라의 행정도 이제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했다. 공항에서 여행객들의 출입국 수속절차나 새로 전화기를 설치하는 일이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는 평가를 예로 들 수 있다. 한국 행정의 신속성은 전쟁과 '압축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되어 이제는 국민성의 일부가 된 '빨리빨리 문화'에서 비롯되는 면이 있다.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한 정보화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러나 사전 준비에서 사후 평가에 이르기까지의 철저한 절차적 합리성을 요구하는 근대 관료제의 원칙을 간과함으로써 행정의 효율성이 극대화되는 측면도 있다.

이처럼 절차적 합리성이 미흡한 한국 행정에 대한 긍정론도 없지는 않다. 이전 세기까지는 절차를 준수하는 관료주의 행정원리가 바람직했지만 21세기 탈근대주의 시대에는 한국처럼 다소 무질서해 보이지만 신축적인 행정이 오히려 더 바람직하다는 낙관론이 그것이다. 유의할 것은 이와 같은 '쾌속 행정'의 이면에는 안전성과 책임성에 대한 취약점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자연 여건에서는 일본은 물론이고 세계에서도 가장 안전한 나라에 속한다. 한국인들의 '안전 불감증'은 이처럼 천연의 안전 지역에서 살아오면서 일종의 문화의 형태로 자리 잡은 측면도 있다. 그 때문인지 우리나라의 재난 재해는 인위적이거나 혹은 부실한 대처로 인해 발생하는 '인재'(人災)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식목일마다 발생하는 산불에서 지하철이나 심지어 문화재의 방화가 전자의 예라면, 여름마다 같은 하천에서 되풀이되는 수해는 후자에 해당한다. 경제적 손실을 넘어 아직은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환경재앙이 우려된다는 '구제역 파동'도 결국 관련 행정 당국의 초기 대응 실패에 그 원인이 있다는 점에서 후자에 속한다.

그런가 하면, 해외공관 소속 공직자들 간의 치정 사건에서 지방법원 책임자의 이른바 '원님'형 부패 사건에 이르기까지 한마디로 행정의 '나사가 빠진' 것은 아닌가 의구심이 드는 요즈음이다. 이들이 한 나라를 대표하는 가장 상징적인 공직자들이어야 할 외교관과 법관일진대, 국민들은 한심한 수준을 넘어 우울한 생각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절반에 가까운 국민들이 한국에서 공직부패가 여전한 것으로 여긴다는 한 국책연구원의 설문조사 결과가 있다. 세계 13위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한국에서 부패 인식 수준은 여전히 40위권에 머물러 있다. 21세기 '위험 사회'의 시대에 행정의 탈근대화를 서두르기에 앞서 먼저 근대화부터 제대로 다져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용덕(서울대 교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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