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좋은생각 행복편지] 낙타의 배신

하루는 지인이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주위에 사람은 많은데 정작 내가 힘들 때 위로가 되어 주는 사람이 없다며 그동안의 인간관계를 되돌아보게 된다고 말입니다. 저도 종종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함석헌의 시가 제게 묻는 것 같았습니다.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마음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지인은 다른 사람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삽니다. 아무리 아파도,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 내색 안 하고 혼자 감내합니다. 그래서 모두들 그 사람은 정말 강하고 대단하다고 평가합니다. 하지만 그가 강하게 보이려고 애쓸수록 제 눈에는 그 속에 숨은 외로움과 고단함이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사람이 하는 모든 얘기를 잘 들어줍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금 많이 힘들군요. 내가 맛난 밥 살 테니 먹고 힘내요", 이런 식입니다. 충고나 조언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위로를 가장한 가르침이 상대방의 기분을 더 상하게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지인이 또 사람 이야기를 하던 날 결국 저도 '가르치는'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힘들면 힘들다, 괴로우면 괴롭다고 말 좀 하면서 살아요. 힘들다, 괴롭다 말한다고 사람들이 약하게 보거나 깔보지 않으니까 걱정 말고요. 만약 남의 약점 이용하는 못된 사람이 있으면 친구 안 하면 되잖아요." 지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잘 안 된다"고 하더군요. 당연합니다. 남을 의식하면서 사는 사람, 독립심 강한 사람, 자수성가한 사람, 집안을 위해 희생하면서 산 사람들이 대개 그런 성향을 보입니다.

저의 연구소를 찾아오는 많은 내담자들이 자기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답답함과 고통을 호소합니다. 마음속에 있는 걸 다 토해내면서 살고 싶다면서요. 문학치료 체험이나 강의 때 감정 표현이 서툴러 힘들어하는 주인공이 나오는 작품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여기저기서 공감의 반응을 보내옵니다. 눈시울을 붉히는 60대 할머니도 보았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자기 할 말 다하면서 목소리 높이고 사는 듯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습니다. 어쩌면 함석헌의 시에 나오는 '그런 사람'을 우리가 가지기 힘든 이유는 사람들이 "내 마음도 좀 알아주세요. 상황이 이래서 나도 힘이 듭니다"하고 내색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드라마를 봐도 그렇잖습니까. 가족을 위해 평생 헌신한 아버지나 어머니가 암 선고를 받고 난 다음의 스토리는 시청자들도 다 압니다. 투병 사실을 숨기고 혼자 치료받다 한참이 지나서야 가족이 알게 된다거나, 기러기 아빠가 모든 재산을 정리해서 외국에 있는 가족에게 보낸 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살다가 외롭게 죽음을 맞는다는 식이지요. 뻔히 아는 전개임에도 시청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드라마에 빠져듭니다.

어느 순간부터 저는 그런 드라마가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아픔까지 공유하는 것이 진정한 가족이고 이별을 준비할 시간도 우리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마음의 준비도 못했는데 어느 날 아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될 아이들의 충격, 마지막으로 함께할 수 있는 시간조차 주지 않은 남편의 일방적인 희생에 아내는 고마움보다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낙타는 사람을 배신하는 짐승이라서 수천 리를 걷고도 지친 내색을 않다가 어느 순간 무릎을 꺾고 숨을 놓아 버린다고 합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을 따라 충실하게 걷다가, 까탈을 부리지도 않고 걷다가, 힘들다는 내색도 하지 않고 걷다가, 예고도 없이 숨을 놓아버리는 낙타를 코엘료는 숭고하다고 칭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을 배신하는 짐승'이라 비난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사람과 함께 사막을 건너는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혼자서 자기만의 길을 걷고 있는 이들에게는 '침묵' '무던함' '참음'이 미덕일 수 있지만 동행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치명적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돌아보고 귀 기울여 봅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혹은 가족 중 누군가가, 친구가, 낙타처럼 걷고 있지는 않은지.

김은아(영남대 유아교육과 겸임교수·마음문학치료연구소장 happymind100@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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