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일본에 대해 이성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을 경멸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일제강점기를 험하게 거쳐 온 부모님과 주변 어른들의 시각이 은연중 어린 나에게 배어서 그렇게 된 게 아닌가 싶다. 그때 나는 단 한 번도 일본인, 일본사람이란 말을 어른들에게서 들을 수 없었다. 거친 말을 거의 쓰지 않던 아버지도 '일본사람'이란 말 대신 꼭 '왜놈'이란 말을 썼던 것이다.
아버지는 장남인 백부를 대신해 일본 나가사키로 징용을 갔다. 1943년의 일이다. 성실하고 필체가 좋았던 아버지는 그곳에서 군대가 아니라 다행히 군수공장으로 차출되어 공장을 관리하는 여러 가지 허드렛일을 했다고 한다. 이후 기회를 엿보다 그곳을 탈출하여 어느 염색공장에서 숨어 지내다 엄청난 고생 끝에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해방이 되자 집으로 돌아오셨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외할머니나 다른 가족들에게서만 간간이 들을 수 있었다. 내 기억에는 조곤조곤 옛 이야기를 잘 해주던 아버지, 당신 스스로 징용 간 이야기만은 하신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언젠가 '거기서 배워온 기술로 내가 밥을 빌어먹는구나'라는 혼잣말을 하시는 걸 들은 기억은 어렴풋하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돌아온 후 십년 이상 염색일은 하지 않다가 철원의 농장을 6'25로 접게 되자 어머니의 설득으로 그 일을 시작하셨다고 한다.
늘 직공들과 함께 커다란 솥에 실을 삶고 뜨거운 김을 쐬며 그것들을 휘젓고 염색하며 열심히 일을 하던 젊은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지만 아버지가 그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린 우리들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아지노모도'(조미료)가 들어간 음식이나 '들큰하게 단 것'을 극도로 싫어한 걸로 어머니에게 표출했지만 그 반찬 투정이 '거기서 배워 온 하기 싫은 일'을 하게 만들었다는데에 대한 소극적인 화풀이였단 것도 우리는 알고 있었다.
지난 금요일, 끔찍한 일본의 지진과 쓰나미를 실시간 재난 중계방송으로 보면서 참으로 기분이 착잡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 탁 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저녁 약속 시간은 다가오는데 자리에서 쉽게 일어날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일본의 튼튼하다는 방재 시스템으로 무조건 인명이 상하지 않고, 큰 피해가 없기만을 저절로 빌게 되었다. 순간 아버지가 이 사태를 거기서 당했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상상을 해봤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선한 나의 아버지는 위험을 무릅쓰고서 '왜놈'들을 한 사람이라도 구하기 위해 애쓰셨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박미영 시인'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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