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살아가는 이야기] 미나리

회식하러 미나리 밭 갔다, 손님과 주인딸이 만나 '웨딩마치'

생활의 발견, 작은 감동 등 살아가면서 겪은 경험이나 모임, 행사, 자랑할 일, 주위의 아름다운 이야기, 그리고 사랑을 고백할 일이 있으시면 원고지 3~5매 정도의 분량으로 사진과 함께 보내주십시오.

글을 보내주신 분 중 한 분을 뽑아 대구백화점 10만원 상품권을 보내드립니다. 많은 사연 부탁드립니다.

보내실 곳=매일신문 문화부 살아가는 이야기 담당자 앞, 또는 weekend@msnet.co.kr

지난주 당첨자=권오분(대구 서구 중리동)

다음 주 글감은 '월급날'입니다

♥ 딸에게 도레미송 가르쳐

도는 하얀 도화지, 레는 둥근 레코드, 미는 파란 미나리, 파는 예쁜 파랑새, 솔은 작은 솔방울 ♪♪

유치원 다니는 딸애가 이 노래를 아주 기쁜 마음으로 부르고 있었다.

도화지는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것으로 알지만 둥근 레코드와 미나리, 파랑새, 솔방울은 직접 보지 못했다. 그냥 선생님 따라서 부르는 노래로는 교육이 될 것 같지 않아 하나씩 노래의 의미를 되새기며 가르쳐 주려고 길을 나섰다.

둥근 레코드판은 1960년대에 육십이 다 되어가는 큰언니가 즐겨 들었던 노래판이라는데 나도 설명만 들었지 그 레코드판을 직접 구경한 적은 없었다.

그 비슷한 것으로 노래 담긴 CD를 보여주며 설명을 해 주었고, 파란 미나리는 직접 먹어보는 게 맛과 향기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유명한 청도 한재미나리 밭으로 갔다.

삼겹살 지글지글 구워서 사각거리는 미나리 줄기를 된장에 쿡 찍어 먹었더니 가만히 보고 있던 딸애가 그대로 따라하기 시작했다.

야채라고는 입에 대지 않던 아이가 고기 한 점 입에 넣고 미나리를 된장에 찍어 배가 부르도록 먹고 나서는 "엄마, 저 풀이름이 뭐야"하는 것이다. 그런 질문을 하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궁금해 할 적에 가르쳐 주는 게 교육의 효과가 더 크다는 것을 알고 이때다 싶어 도레미송을 불러주며 '미나리'란 걸 가르쳐 주었다.

그날 이후 딸애는 장난감을 만지며 놀 때도 늘 도레미송을 흥얼거렸다.

올해도 봄이 오기 전 2월의 미나리 맛이 최고라기에 3월이 시작되기 전에 청도 한재미나리 밭으로 가게 되었다.

농촌의 들녘을 지나면서 도레미송을 부르는 여중생이 된 딸애를 보며 지난날을 기억하는지 넌지시 물어보니 엄마아빠가 데리고 다니면서 그런 식으로 하나씩 가르쳐 주는 것들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책상 앞에 앉아 책을 달달 외우는 것보다 유적지나 박물관을 가보는 것이 훨씬 공부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덧붙이는 딸. "그때 이 미나리를 먹어보지 못했으면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냥 논에서 자라는 잡초인 줄만 알았겠지! 엄마, 미나리 맛있다 그치?"

문권숙(대구 북구 국우동)

♥잔소리 심해지면 미나리 원망

우리 이모부는 미나리 때문에 인생이 바뀌었다고 투덜거린다. 요즘처럼 미나리가 나오는 봄이 되면 이모 부부가 떠올라 입가에 웃음이 지어진다.

때는 2003년 3월, 당시 신입사원이었던 이모부는 회사에서 회식 삼아 직원들과 함께 미나리 농장으로 놀러갔다. 팀 막내였던 이모부는 당연히 잡다한 일들을 해야 했다. 한창 미나리가 나는 제철이어서인지 그날따라 미나리 농장에 손님은 넘쳐나, 모든 식구가 미나리를 수확하고 씻는 일에 나섰다. 미나리가 빨리 나오지 않자, 팀원들은 이모부에게 미나리를 씻어오라는 특명을 내렸다. 바쁜 주말이라 이모도 미나리 씻는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이모부는 미나리를 씻는 곳에서 어정쩡하게 서서는 이모가 미나리를 씻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이모와 이모부는 그렇게 미나리 향 가득한 비닐하우스 안에서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모는 미나리를 많이 먹어서인지 피부가 유난히 희고 곱다. 이모부는 봄 향기에 취한 것일까. 당시 이모의 깨끗하고 향긋한 첫인상에 푹 빠졌고, 미나리가 맛있다는 핑계로 매주 외갓집 미나리 하우스를 찾아왔다. 이모도 처음에는 귀찮다고 말했지만 이모부의 관심이 싫지 않은 눈치였다. 노처녀였던 이모를 한시라도 빨리 시집보내고 싶은 마음에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손길도 바빠졌다. 이모부를 지원해주며 이모부가 올 때마다 푸짐한 삼겹살과 미나리를 준비해주셨으니 말이다. 미나리 철이 끝날 무렵 이모와 이모부의 관계는 상당히 진척돼 있었고, 그해 가을 웨딩마치를 올렸다.

지금은 귀여운 아이가 두 명이나 있다. 이모부는 이모의 잔소리가 심해질 때마다 미나리를 원망하곤 한다. 올해도 미나리가 제철이다. 두 분이 더욱 행복하게 잘 살길 바란다.

김원구(대구 수성구 상동)

♥ 이웃집과 같이 한재로 나들이 계획

미나리 향이 최고라는 요즘, 가족 나들이로 한재로 가기로 하고 동네 식육점에 돼지고기를 사러 들렀다. 마침 공휴일이라 퇴근하던 이웃을 만나 한재로 나들이 간다고 했더니 따라오겠다고 했다. 아이들 여럿이 어울리면 더 나들이 기분이 나겠다 싶어 뒤따라 오라고 하고 우린 먼저 출발했다. 수성IC를 통해 고속도로를 달려 청도 쪽으로 향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상쾌한 기분이었다. 우리 식구가 먹을 점심밥과 김치는 미리 챙겼고 삼겹살도 넉넉히 샀으니 미나리와 맛있는 점심만 먹으면 되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한재에 가까이 가면서 공휴일이라 길이 밀리기 시작했다. 겨우 찾아간 미나리 하우스에는 먼저 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주인 할머니의 들어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들어가 자리를 앉으려는 순간 뒤따라 들어온 다른 가족이 먼저 자리를 차지해 버렸고 불판을 챙겨들고 이리저리 둘러보다 결국 자리를 잡지 못하고 도로 나오고 말았다. 하는 수 없어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손질하고 있는 미나리라도 좀 사서 오려고 물어봤더니 여기 온 사람이 먹을 것도 없다며 손을 내저었다. 좋은 마음으로 미나리 먹으러 왔다가 화가 팍 나고 말았다.

마침 뒤따라 오기로 한 이웃이 전화가 왔다. 고기는 샀는데 사정이 생겨서 못가겠다고.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처 와인터널과 몇 군데 청도를 둘러보고 일찍 돌아왔다.

오는 길에 근처 마트에 들러 한재미나리 한 단을 샀다. 그리고 이웃 가족을 불러서 점심때 먹기로 했던 삼겹살을 저녁식사로 먹었다. 쪼그리고 앉아 불편하게 먹는 것보다 집에서 먹으니 더 마음이 편했다. 고소한 삼겹살과 한 입 가득 미나리를 입에 넣고 막걸리 한잔을 기울이며 한재 나들이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며 불편했던 마음을 털었다.

송연수(대구 수성구 지산동)

♥ 미나리 농사로 세 아이 대학 보내

동명 쪽으로 가다 송림사 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미나리밭이 보인다. 물이 고였으니 미나리 논이라고 해야 할까? 하여튼 미나리를 지게로 가득 짊어지고 와서 길가에 내려놓으면 그의 아내인 듯한 여인이 펌프로 물을 길어올려 커다란 고무통에 설렁설렁 미나리 뿌리 쪽의 누런 잎을 떨어내고 흙을 털어내서 짚으로 한 묶음을 만들어낸다. 약간은 살갗에 닿는 바람이 차가운데 흙길을 밟으려고 도회지를 벗어나려 나간 곳이 송림사였다. 주차장에 자동차를 세워두고 연못 있는 곳으로 내려오니 미나리밭 주변에서 그런 광경을 보게 되었다.

몇 척의 작은 오리배가 둥둥 떠 있고 고기가 잡히는지 마는지 접이식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수면(水面)을 바라보는 사람의 등에 비친 햇살은 따사롭게 느껴지는 3월에 미나리 향기가 솔향기처럼 머리를 맑게 해주는 것 같았다.

저렇게 한 무더기나 내려놓고 또다시 낫을 들고 지게 진 채 미나리 논으로 가는 걸음이 장화를 신어서인지 왠지 무겁게만 느껴지는데, 저것을 생으로 먹어? 아니면 데쳐먹어? 전 부쳐 먹어?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엄마의 마음을 읽었던지 아이가 먼저 "맛있겠다"라고 한다. 어떻게 요리를 해 먹을지도 모르는데, 싱싱하고 향긋한 냄새가 좋아서인지 맛있겠다고 하는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마는 미나리 주인의 눈빛을 보는 순간, 몇 단이라도 사야 할 것 같아 다가갔다. 한적한 일요일이라 그날 하루 시간이 무한정 주어진 것 같은 여유로움에 미나리 농사로 먹고살 만하냐고 남편이 싱겁게 물어보는 말에 세 자녀 대학 다 보냈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힘들게 보이던 아주머니의 모습이 얼마나 존경스럽던지!

초면인 그분과 한참을 수다 떨고 있으니 지나가는 사람들 하나둘 모여들어 두어 단씩 사들고 가서 금세 동이 나고 말았다. 우리식구들 덕분에 떨이했다며 한 단을 덤으로 주시는 인심 후한 아주머니가 그렇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셨으니 자녀들 모두 건강하고 순탄한 가정을 꾸려 가시는 것 같았다. 미나리가 주는 행복감을 우리도 느낄 수 있었던 하루였다.

양남이(대구 달서구 용산동)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