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홍은 옛 칠곡 인동 사람이다. 1916년 조선보병대를 중도 제대한 후 광복단에 가입한 그는 1918년 만주로 가서 광복단 동지들과 무장투쟁을 결심하고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동포 청장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3'1운동 때 일제의 만행을 조사해 폭로했으며, 1925년 대구에서 이정기와 안동 출신의 이원기 이육사 형제 등과 비밀결사를 하고, 1927년 봄 광복단원 이내성의 소개로 일본인 폭탄 전문가에게 폭탄제조법을 익혔다.
그해 10월 18일 아침 대구의 덕흥여관에서 꿀 선물상자로 위장한 폭탄 4개를 점화한 후, 여관 종업원에게 조선은행 대구지점과 경북도청'경북경찰부'식산은행 대구지점 등에 배달시켰다.
그러나 포병 중위 출신인 조선은행 일본인 직원이 상자에서 화약냄새를 맡고 도화선을 차단하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지만, 길 옆에 놓아두었던 나머지 3개가 폭발해 건물이 파괴되고 경관과 직원 등 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장진홍은 동지들의 집에 은신하면서 거사를 다시 계획했지만 실행하지는 못했다.
1928년 1월 일제는 이정기 이원기 이육사 등 항일 인사 8명을 붙잡아 모진 고문 끝에 이들을 진범으로 몰아 재판에 회부했다. 이때 이원기는 고문으로 불구가 되고, 민족시인 이육사는 수인번호 64를 자신의 호로 정했다.
같은 해 2월 일본 오사카로 가서 동생 집을 거점으로 재기를 도모하던 장진홍은 1929년 2월 14일 자정 무렵 일경에 체포되고 말았다. 대구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장진홍은 1930년 7월 30일 밤 36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자결 순국했다.
'일제에 죽느니 내 손으로 죽겠다'던 평소의 소신에 따른 것이었다. 장진홍의 과감하고 용의주도한 거사는 1920년대 후반 항일 의열투쟁의 큰 불꽃이었고, 그 불굴의 기개와 드높은 독립의지는 겨레의 가슴에 길이 살아남았다.
조향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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