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 피해자 2세대라는 꼬리표가 한평생 저를 따라다녔어요. 일본에서 더 이상 피폭자가 나오지 않아야 할 텐데…."
17일 오후 만난 이홍현(65) 씨는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폭발 사건을 이야기하자 한동안 깊은 한숨만 내쉬며 눈을 감았다.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원자폭탄의 아픔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이 씨 가족은 가난을 피해 일본 히로시마로 이주했고 친척 일가 43명이 그곳에서 삶을 일구고 살았다.
그날 원폭이 떨어지면서 미쓰비시 군수공장에서 일했던 큰아버지가 숨졌고, 리어카를 끌고 집을 나서던 고모부가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자들의 삶도 고통스러웠다. 이 씨의 아버지는 평생 기관지염으로 고생하다가 1997년 숨을 거뒀고 같은 병을 앓던 어머니도 10년 전 세상을 떠났다.
사고 당시 어머니 배 속에 있었던 이 씨였지만 원폭 상처는 대를 이어 전달됐다. 원인 모를 두통이 머리를 짓눌렀고 신장 질환으로 병원 신세를 지는 날이 많아졌다.
"젊었을 때는 건설회사에서 일했어요. 몸이 아프니까 남들보다 두 배 이상 노력해도 따라가기 힘들었습니다." 30년 전부터는 등에 흰색 반점이 뒤덮기 시작했다. 국내 병원에서는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다는 얘기만 했다. 그는 결국 자신에게 병을 안긴 일본으로 건너갈 수밖에 없었고, 그곳에서 '원폭 후유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에게 원폭 후유증보다 두려웠던 것은 세상의 차가운 시선이었다. "원폭 피해자와 결혼하면 기형아를 낳는다" "같이 있기만 해도 전염된다"는 편견이 그의 가족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이 때문에 원폭 피해자 1세대였던 이 씨의 누나는 시집 가기 전 많은 눈물을 쏟아냈다고 했다. 이 씨도 결혼 당시 처가에 원폭 피해 사실을 숨겨야 했다. "원폭 피해자 2세대라고 밝히면 처가에서 결혼을 허락해주지 않으리라는 생각해 결혼한 뒤 3년이 지나서야 털어놓을 수 있었어요."
누구보다 이런 고통을 잘 아는 이 씨이기에 일본에서 피폭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그는 사고 소식을 접한 뒤 오사카에 있는 재외 피폭자 지원단체인 '한국 원폭피해자를 구원하는 시민 모임' 회장 이치바 준코(55'여) 씨에게 전화를 걸어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이치바 씨는 30년간 한국 원폭 피해자들을 지원해준 고마운 사람이다. "이치바 씨는 현재 일본 상황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다고 하더군요. 피폭자가 더 늘어나지 않아야 할 텐데, 마음으로밖에 그들을 위로할 수 없는 현실이 더 슬프네요." 이 씨는 "나 같은 피폭자가 더는 없었으면 좋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방출되는 방사능 물질
▷요오드 131=기체 형태로 방출되는 요오드 131의 반감기는 8년. 방사선인 베타와 감마선을 방출해 발암성이 매우 높다. 오염된 공기를 마시게 되면 목에 있는 갑상선에 쌓여 갑상선암에 걸릴 수 있다.
▷스트론튬 90=기체 형태로 방출되며 반감기는 28년. 베타와 감마 방사선을 만들어내 폐암을 유발하고 골수암이나 백혈병을 일으킨다.
▷세슘 137=반감기가 30년이며 인체 근육에 축적되면 근육암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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