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밀양 신공항 유치를 위한 서명지가 붙어 있었다. 또 직장에서는 대구시의 요청으로, 항공 수요를 늘리기 위해 출장을 갈 때는 가능한 한 대구공항을 이용하라고 권했다. 시내의 거리와 골목마다 신공항 플래카드가 넘쳐난다. 매스컴에는 연일 '영남권 신공항 밀양유치 범시도민 "결사"추진위원회'의 이벤트가 보도된다. 글자 그대로, 대구경북의 시도민 모두가 죽기를 각오하고 신공항 밀양 유치를 추진하고 있다. 대구가 이처럼 뜨거웠던 적이 없었다.
가덕도를 주장하는 부산도 '사생결단의 기세'로 홍보전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이러다가는 대구나 부산 둘 중에 하나는 죽어야 할지 모른다. 아니 신공항이 결정되기 전에 한쪽을 쓰러뜨려야 다른 한쪽이 살아남는 형국이다. 부산에 직장을 가지고 주말에 귀향하는 아내는 대구와 부산의 이런 광경을 보고 곤혹스러워 한다. "차라리 신공항 안 하는 게 낫겠다"고 푸념한다. 나는 "당신 대구 사람아이가"라고 핀잔한다.
무엇이 대구와 부산의 이런 갈등구조를 만들었는가. 현 정권은 동남권 신공항을 지난 대선공약으로 내걸었다. 지극히 정치적 결정이었다. 남부 지방의 항공 수요를 흡수하고 지역발전을 꾀하겠다는 정치적 비전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대통령은 "신공항 후보지 결정은 정치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한나라당 지도부와 서울의 일부 언론에서 고개를 들고 있는 신공항 무용론과 같은 맥락으로 들린다. 정치적 결정을 배제하겠다는 말은 결정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적 결정이 아닌 국가 정책이 있는가. 대통령과 국회를 비롯해 최고정책결정기구를 반드시 국민이 뽑은 정치인으로 구성하고 있는 이유이다. 그렇지 않으면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시험을 쳐서 뽑아야 한다.
정치는 대립과 분쟁을 조정, 해결하면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인간 활동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는 근대적 개념이다. 근대 이전의 공동체 사회에서는 분쟁 해소와 질서 유지를 위한 전통적 룰이 존재했기 때문에 정치라는 작용이 불필요했다. 근대 이후 공동체가 붕괴되면서 이해 조정과 질서 유지를 위한 작위적 노력이 필요해졌다. 그것이 바로 조직화된 사회로서의 국가이며, 그 운영원리로서의 정치이다. 따라서 정치와 국가는 불가분이며, 정치 없이 사회를 유지, 운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면서 정치적 동물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거의 모든 정책은 정치적 결정이다. "정치 없이는 정책도 없다"는 명제는 이렇게 해서 나온 말이다. 우리는 이 당연한 사실을 애써 외면하려 한다. 정치적 결정을 위해 존재하는 정치인들조차 이를 회피한다. 정치인이 정치적 결정을 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정치와 자기의 존재 의의를 부정하는 자가당착이다. 정치에 대한 욕망이 유독 강한 한국에서 왜 이런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정치에 대한 불신과 혐오 때문이다. 정치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신공항을 둘러싼 지역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하루빨리 후보지를 결정해야 한다. 정치로부터 도망갈 것이 아니라 여러 모순적 이해관계와 타당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정치적 결정'을 해야 한다. 만약에 다음 선거를 생각해서 이번에도 결정을 하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면, 그것이야말로 사회적 지역적 갈등을 방치하는 가장 비정치적 행위이다.
정치인에게 가장 어리석은 생각은 정치적 결정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역사의 판단에 맡긴다는 것이다. 매우 그럴듯하고 고상하게 들린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인의 자기부정이고, 자기의 존재 가치를 포기하는 것이다. 정치의 본래적 기능은 현재적 문제를 둘러싼 갈등 해소에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는 역사의 판단이 아니라 현재의 정치적 판단을 필요로 한다. 대통령은 더 이상 정치를 포기하지 말고, 신공항에 대한 정치적 결정을 해야 한다. 그래야 정치가 살아있고 국가가 제 기능을 하게 된다. 대구와 부산도 지역 갈등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이성환(계명대학교 교수·일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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