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 옛 도심, 이야기로 살아난다] ⑫호암 이병철과 삼성상회

"만주에서는 굶으며 싸우는데…그 사람들한테 미안하지 않나"

호암 이병철
호암 이병철
삼성상회 터.
삼성상회 터.

호암 이병철(湖巖 李秉喆·1910~1987)은 1938년 3월 1일 대구 인교동에서 삼성상회(三星商會)를 열었다. 청과물, 건어물 그리고 잡화 등의 무역을 하는 회사였다. 삼성의 삼(三)은 큰 것, 많은 것, 강한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우리 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이다. 성(星)은 밝고 높고 영원히 깨끗이 빛난다는 의미이다. 재출발하는 사업에 크고 강력하고 영원하라는 염원을 담아 그 스스로 삼성이란 상호를 택했다. 대구 일대에서 생산되는 청과물과 건어물 등을 만주로 수출하는 일을 했다. 마산의 곡물거래에서 얻은 교훈을 살려 청과물의 작황이나 어황도 끊임없이 조사했다. 그 덕분에 가격의 급격한 등락에도 당황하지 않고 사업기반을 다져갔다.

삼성상회를 개업한 지 1개월쯤 되던 날, 와세다대학 시절의 친구였던 이순근이 찾아왔다. 그는 와세다대학을 졸업했으나 재학 중 학생운동을 한 탓으로 요주의 인물로 찍혀 계속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백수생활을 하고 있었다. 호암은 순근을 맞아 인근 다방으로 갔다. 카운터에서 돈을 세고 있던 마담이 호암을 보자 활짝 웃으며 뛰어나와 자리를 잡아 주었다.

"순근이, 요즘 어떻게 지내나?"

"나야 작년하고 같지."

"하하, 그렇구나. 우문현답이야. 그런데 내가 청과물, 건어물, 잡화 따위를 만주와 중국으로 수출하고 있는데 자네 생각은 어때?"

"지금이야 물자가 부족하니 수출보다 수입이 더 낫지 않을까? 식자재는 절대 부족한 실정이고 보면 수입만 하면 파는 것은 시간문제일 거야. 그런데 청과물은 아무래도 상하는 것이고 보면 위험부담이 조금 있지 않을까?"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무심코 던져본 물음이었지만 순근의 대답은 흘려들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많이 배운 놈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네 말을 듣고 보니 그런 면도 있네. 조선은 아직 절대적으로 물자가 부족하니 수입하는 편이 돈은 더 되겠지. 그렇지만 수입보다 수출이 나라에 도움이 더 안 되겠나? 수입하여 나만 배 불리자고 하니 조금 양심에 찔리는 것 같아."

"우리한테 나라가 어디 있어? 나라 없는 백성이 무슨 얼어 죽을 나라 걱정이야. 나라 걱정이 된다면 어떻게든 돈을 많이 벌어 나라를 찾는데 보태는 게 맞는 거 아닐까? 그게 아니라도 식민지 상태에서 우리가 선택할 길은 돈을 많이 버는 길밖에 없다. 와세다 같은 일류 대학을 헌신짝 버리듯 하고 일찌감치 사업을 선택한 자네의 용기와 혜안이 존경스러워."

순근은 학창시절의 순수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무슨 과찬의 말씀을, 자네도 뭔가를 해야 될 텐데…."

"구멍가게라도 하나 할까 해도 밑천이 없으니 마음뿐이야."

호암은 순근의 말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 친구를 지배인으로 채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조그마한 신설 회사에서 경영일체를 맡을 지배인이 과연 필요할까? 지배인을 두고 경영 일체를 지배인에게 맡긴다면 뜻하지 않는 사태를 초래하지 않을까?'

'은행의 거액 융자나 대량의 자재구입과 수주 등 일부 중요한 문제를 직접 챙긴다면 지배인을 두어도 괜찮지 않을까? 이순근같이 믿을 수 있는 고급인력을 조그마한 신설 회사에서 어떻게 구할 것인가? 게다가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자임을 잘 알지 않는가?'

'의인물용, 용인물의'(疑人勿用, 用人勿疑), 의심이 가거든 사람을 쓰지 말고, 사람을 썼으면 의심하지 말라. 아버지의 가르침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호암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순근이, 삼성상회를 맡아주지 않겠나? 같이 힘을 합쳐서 제대로 된 회사를 한번 만들어 보세. 지배인을 맡아주게, 물론 자네 능력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자리지만, 나를 봐서라도 같이 한번 잘 해 보지 않을 텐가? 중요한 문제를 제외하곤 일상적인 경영에는 간여하지 않을 것을 내가 약조하지. 어음 발행이나 인감관리 등도 자네한테 다 일임하겠네."

너무나 갑작스럽고 파격적인 호암의 제의에 순근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순근의 자존심을 살려주는 그의 배려에는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순근은 벌떡 일어나 호암의 손을 덥썩 잡았다. 그의 두 눈에는 눈물이 글썽 그렸다.

그 후 호암은 약속대로 전권을 지배인인 순근에게 넘겨주었다. 의심하면서 사람을 부리면 그 사람의 장점을 살릴 수 없고 고용된 사람도 제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사람을 채용할 때는 매우 신중하고 일단 채용하면 대담하게 일을 맡기는 원칙은 호암 이병철의 일관된 경영철학의 굵은 기둥의 하나가 되었다.

삼성상회 지배인으로 취임한 이순근은 두터운 우정으로 친구의 신뢰에 보답하였다. 삼성상회는 순풍에 돛단 듯 날로 번창했다. 자금에 여유가 생기자 호암은 새로운 투자처를 찾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제조업이 없던 그 당시 양조업은 그야말로 황금 알을 낳는 거위였다. 양조업에 마음을 굳히고 사전 조사에 착수했다. 양조는 당시 허가가 제한되어 신규 사업자가 쉽게 진입할 수가 없어서 상당 기간 업계를 정탐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던 차에 일본인이 경영하던 조선양조라는 회사가 매물로 나왔다. 호암은 매도자가 원하는 호가를 모두 주고 즉시 조선양조를 매수했다. 삼성상회를 개업한 지 1년 만이었다. 양조업도 순항하여 호암은 오래지 않아 대구에서도 손꼽히는 고액소득자가 되었다. 호암이 돈을 많이 벌었다는 소문을 듣고 돈을 빌려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래서 장사꾼이나 사업가는 항상 돈 없다고 징징되는가 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고향 친구 한 사람이 호암을 찾아왔다. 너무나 오랜만이라 서로가 반갑게 손을 잡고 얼싸안기까지 했다. 재회의 기쁨도 잠시뿐 친구는 손을 부비며 돈을 조금 융통해달라고 했다. 호암은 다소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 돈으로 무엇 하려고?"

"조그마한 쌀가게나 하나 차리려고 하는데 돈이 조금 부족해서 염치없이 자네를 찾아왔네. 면목이 없네."

"장소는 봐 놨나?"

"자갈마당시장이 좋을 것 같더군. 그래서 가게도 봐 두었네."

"쌀가게를 어떻게 운영하려고 하는가?"

"내가 원래 농사짓던 놈 아닌가. 쌀에 대해서 잘 알고 유통 경로도 잘 알지. 다른 것보다 잘 할 수 있을 것 같네. 잘 할 수 있는 것을 열심히 하는 것이 성공할 것 같아서 쌀장수로 결정했네. 난 머리로 하는 것은 자신이 없고 몸으로 때우는 것은 자신 있거든."

"언제 갚을 건가?"

"당장은 힘들 것 같고 세 달 정도면 자리 잡을 것 같으니까 개업 후 넷째 달부터 매월 조금씩 갚아주겠네. 넉넉잡아 일 년이면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네."

그 친구는 두 손을 마주 잡고 머리를 조아리며 호암의 눈치를 살폈다. 절절하고 진실해 보였다.

"알았네. 차용증서나 한 장 쓰게. 이자는 안 줘도 되니까 부디 성공해서 원금이나 갚게."

호암은 그냥 돈을 줘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어금니를 깨물고 참았다. 빌려주는 게 그 친구에게 긴장감을 주고 일도 더 열심히 하게 할 것 같았다. 공짜는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양조업이 날로 번창하자 돈과 시간을 주체할 수 없게 된 호암은 친구나 양조업자와 어울려 요정 출입을 시작하게 되었다. 술은 잘 마시지 못했지만 그 분위기를 즐겼기 때문이었다. 대구의 요정에 싫증이 나면 서울이나 부산으로 나들이를 했으며 어떤 때는 그것도 모자라 일본까지 원정을 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가까이 지내던 친구 채현병이 찾아왔다. 그는 마치 작심한 듯 호암을 보자마자 정색을 하고 된통 쏘아붙였다.

"어제도 요정에 갔다 온 모양이지. 어제도 그제도 요정이고, 오늘도 내일도 요정 갈 거지? 도대체 자넨 무슨 생각을 갖고 사나? 만주에선 제대로 먹고 입지도 못하는 동포들이 총 들고 조국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는데, 자넨 부모 잘 만나고 운도 좋아서 잘 먹고 잘 사는 것까지는 좋다 이거야. 물론 자넨 능력도 있지. 그래도 그렇지, 나라도 없는 놈이 그렇게 방탕한 생활로 세월만 보내야 쓰겠나? 그 사람들한테 미안하고 부끄럽지 않나? 술 팔아 벌었다고 계집 치맛자락에 모두 다 쏟아 부을 셈인가? 그렇게 살 거면 자네가 소나 돼지보다 나은 게 도대체 뭔가? 정신 좀 차리게!"

채현병은 호암에게 큰 소리로 질책하고선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 그는 전부터 호암이 요정에 자주 출입하는데 대해서 언짢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한 사실은 느낌으로 알고 있었지만 오늘같이 그의 면전에서 그토록 심하게 질책하기는 처음이었다. 호암은 그의 충고가 귀에 거슬리긴 했지만 턱도 없이 화를 낼 만큼 그렇게 타락하지는 않았다. 누구나 귀에 거슬리는 말은 듣기 싫어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귀에 거슬리는 충언을 삼가게 된다. 소원해질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남의 일에 상관하지 않고 편하게만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충언을 하기 싫어한다. 참다운 친구는 충언을 서슴지 않는다. 참다운 친구를 만나기가 쉽지 않는데 호암은 운 좋게도 참다운 친구를 만난 것이었다. 역정과 희열이 동시에 일어났다. 자신은 덕이 없는데 좋은 사람들이 주위에 많은 것으로 보아 인덕이 무척 많다고 생각되었다. 현병의 말처럼 술 팔아 번 돈이지만 술집에 쳐 넣는 것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분들에게 조금 보내는 것도 보람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호암은 날이 새기 무섭게 사람을 보내 현병을 불렀다. 현병은 어제 자기가 조금 심하게 질책했다고 생각했던지 조금 미안해하는 기색이었다.

"현병이, 충고해 줘서 고맙네. 사실 나도 기회가 오면 번 돈을 유용하게 쓸 생각이 있었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내가 자네한테 부탁 하나 하세. 내가 돈을 조금 챙겨 줄 테니까 만주로 좀 보내줄 수 없겠나?"

호암의 말을 들은 현병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얼이 빠진 현병에게 호암은 미리 준비해 둔 야무지게 싼 돈 보따리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 후 해방이 될 때까지 호암은 나라에 세금을 바친다는 생각으로 이익금의 일부를 만주로 보내곤 했다.

해방이 되고 빼앗겼던 조국을 찾자 호암은 양조업과 무역업의 한계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국가발전에의 공헌, 사업보국이란 측면에서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였다. 결론은 수입대체산업으로서의 제조업이었다. 호암은 1951년 전쟁 중 부산에서 삼성물산과 제일제당을 설립하여 불과 2년 만에 거부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돈병철이라고 부를 정도로 유명한 기업인이 되었다. 그러나 호암은 거기에서 머물지 않았다. 기업을 하는 목적이 축재가 아니고 끝없는 도전과 자아실현 내지는 조국과 민족에 대한 공헌, 사업보국이었기에 호암은 신생 조국에 기여할 수 있는 또 다른 새로운 사업을 끝없이 모색하였다. 의복이 족해야 예절을 안다고 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섬유산업을 보면 화섬은 아직 싹트기 전이었고 면방은 몇 개의 공장이 있었으나 질과 양 모두 다른 나라에 비해 낙후되어 있었다. 모방도 수공업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호암은 섬유산업을 새로운 진입 분야로 잠정 결정하고 모방과 면방의 사전조사를 실시했다. 그 때, 강성태 상공부 장관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호암이 먼저 강 장관에게 물었다.

"장관님, 제가 모방을 할까, 면방을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어느 게 좋을까요?"

"긴 안목에서 보면 면방보다 모방입니다. 면방의 기술은 벌써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새로 착수하는 대규모사업이라면 모방이 훨씬 장래성이 있습니다. 이 사장께서 하신다면 정부에서도 적극 후원하겠습니다."

강성태 장관은 그의 가려운 곳을 바로 긁어주었다. 호암은 마침내 모방으로 결심을 굳히고, 1954년 대구에서 제일모직을 설립하게 되었다. 그 후 제일모직은 삼성그룹의 모기업이 되다시피 성장하였고 삼성 그룹의 인재를 길러내는 삼성사관학교로 불려졌다. 호암은 계속 사업을 확장하였고 1969년 설립한 삼성전자는 세계적인 일류 전자회사로 성장하였다. 비록 호암은 떠났지만 그가 설립한 삼성 그룹은 이름 그대로 크고 강력하고 영원한 기업으로 살아남기 위해 지금도 끊임없이 도전하고 변신하고 있다. 호암은 결국 그의 꿈인 사업보국을 훌륭하게 실현해낸 것이다.

호암 이병철은 경남 의령에서 태어났지만 대구 달성군 하빈의 명문가로 장가들었으며 삼성의 모태가 된 삼성상회를 대구에서 시작했고 삼성의 밑천이 된 자금을 대구의 조선양조에서 마련하였으며 삼성사관학교라 할 수 있는 제일모직을 대구에서 시작한 대구가 낳은 사람이다. 삼성그룹은 대구가 기른 기업집단이다. 그래서 호암은 1982년 삼성라이온즈야구단을 창단하면서 추호의 망설임 없이 대구를 그 연고지로 삼았다. 대구는 삼성의 어머니와 같다. 삼성이 대구를 떠나갔지만 대구는 삼성을 버리지 않았다. 대구의 기를 받고 대구의 피가 흐르는 삼성은 영원히 세계로 뻗어나갈 것이다. 오철환(소설가·대구시의원)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