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논단] 재벌의 미래는 있는가

이 정부 들어 대기업이라고 불리는 재벌들은 승승장구했다. 삼성전자와 현대차는 사상 최대의 이익을 냈다. 기름값이 천정부지로 오른다 해서 온통 난리인데 정유회사들은 놀라운 실적으로 돈 잔치를 벌였다. 누가 돈을 벌든 간에 경제가 살아나고 국부(國富)가 쌓이는 건 좋은 일이다. 재벌 오너와 임직원들이 경영을 잘해서 떼돈을 벌면 그건 손뼉을 칠 일이지 질투하거나 경원시할 일은 아니다. 그건 또 이 정부가 내건 친기업 기조가 성공했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대통령이 앞장서 '기업 프렌들리'를 외치고 참모들이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헌신한 것이 이렇듯 결실을 보게 되니 얼마나 흐뭇한 일인가.

그런데 엉뚱한 소리가 나왔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이 정부의 성적을 '낙제를 면할 정도'로 평가해버린 것이다.

물론 그 말은 이내 쑥 들어갔다. 진의가 그게 아니다, 이 회장의 특유한 화법에 불과하다는 해명이 뒤따랐다. 그러나 한번 쏟아진 물은 쓸어담기 어려운 건 만고의 진리다. 이 회장의 그 말도 은근슬쩍 없는 것으로 하기엔 영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그 말은 정운찬 전 총리가 대기업의 '초과이익'을 협력업체와 공유하는 길을 찾자는 데서 발단이 됐다. 정 전 총리의 말은 '이익공유제'란 생소한 용어로 지면을 장식하면서 재벌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정치권에서는 급진좌파란 말까지 나왔고 보수언론들은 칼럼과 사설을 동원해 연일 대기업이 번 돈을 왜 다른 기업과 나누느냐고 써댔다. 이 회장은 '이익공유제'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면서 '사회주의 용어인지 공산주의 용어인지 도무지 들어본 적이 없는 말'로 평가절하했다. 심지어 '경제학 책에서 본 적이 없다'는 말까지 했다.

이 정부를 두고 낙제 운운한 말은 그 연장 선상에서 나왔다. 그런 평가를 받은 정부에서 정 전 총리도 일 년이나 봉직했다. 그런데 그 정 전 총리는 오래 전 '석학' 반열에 올라 있는 경제학 교수였다. 나는 그가 왜 대기업의 초과이익을 중소기업과 공유해야 한다고 했는지 안다. 적어도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경제학 교수 출신 전직 총리가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기업 환경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 전 총리의 말에 다들 화들짝 놀라는 모양새가, 나 같은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을 이 나라 언론인과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당사자인 재벌 회장이 모르고 있거나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늘 시장경제를 말하고 계약자유의 원칙을 말한다. 시장경제 아래서는 모든 계약은 상호이익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까놓고 말해 대부분의 계약은 일방은 자유롭고 일방은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대기업에 납품하는 협력업체들은 언제나 자유롭지 못한 쪽이다. 협력업체의 명줄을 쥐고 있는 대기업은 납품단가를 후려치고 그나마도 몇 달짜리 약속어음으로 결제하는 일이 관례가 되어 있다. 이 회장은 삼성은 오래 전부터 협력업체와 상생을 모색해 왔다고 하지만, 지난 10년간 삼성에 납품한 중소기업의 생존율이 어떠한지를 당장 조사해 보라.

나는 과거 개발시대에 벌어졌던 정경유착까지 들먹이고 싶지 않다. 그러나 지금 대기업들이 정부의 보호를 받지 않는다는 말은 넌센스다. 다만 그것이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분노를 표출하지 못할 뿐이다. 단적인 예로 이 정부는 처음부터 친재벌이라는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고환율 정책을 고수했다. 환율에 정부가 개입하지 않는다는 말은 제발 하지 말자. 세계를 통틀어 환율을 문자 그대로 시장에 맡기는 나라는 단 하나도 없다. 1달러에 10원만 올라도 삼성전자와 현대차는 몇 천억원의 매출이 늘어난다. 그런데 환율이 오르면 수입하는 기름값은 오르고 곡물값도 오르고 원자재값도 오른다. 죽어나는 건 고환율로 인해 치솟는 물가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서민들이요 중소기업들이다. 대기업의 웃음 뒤에는 중소기업과 서민의 눈물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랫목의 온기를 윗목까지 좀 퍼지게 하자는 것이 무어 그리 잘못된 말인가? 중소기업이 살아야 일자리도 늘고 서민들도 산다. 무엇보다도 솟는 물가에다 불황을 참아내는 인내심도 생긴다. 그런데 정부 정책의 온갖 수혜를 다 입는 재벌이 이익을 좀 나누자는 말에 공산주의냐고 대들고 정치인은 급진좌파로 몰면 이 나라에 정의가 설 자리는 어디인가? 보수주의는 무조건적인 시장경제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약자를 챙기지 않고 소수를 돌보지 않으면 보수주의가 설 자리는 없다. 무엇보다도 편법상속과 탈세 등으로 얼룩진 우리 재벌들이 이 문제를 먼저 숙고하지 않으면 그들의 미래도 없다.

전원책(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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