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또 그런 일(방사능 유출)이 생기다니. 아이고 불쌍해서 다들 같이 펑펑 울었지."
18일 오후 경남 합천군 합천읍 영창리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서 만난 구선희(85) 할머니와 이외판(86) 할머니는 일본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를 이야기하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이들은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1세대들이다. 66년 전 사고로 구 할머니는 가족을 잃었으며, 이 할머니는 손녀에게 대물림돼 고통을 받고 있다. 1996년 문을 연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는 일제강점기 원폭 피해자 1세대 107명이 모여 살고 있다.
◆"나 같은 사람, 더는 안 생겨야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1945년 8월 6일, 구 할머니는 공사판에서 일꾼들에게 밥을 퍼주고 있었다. "갑자기 '펑' 하는 소리가 났는데 그 뒤로 기억이 안 나."
임신 3개월이었던 구 할머니는 무너진 건물 아래 깔렸고 허리 깊숙이 파편이 박히는 사고를 당했다. 가난한 형편 탓에 병원에 갈 수도 없었고 약조차 구할 수 없었다. 배 속의 아이는 다행히 무사했다. 그는 급한 마음에 시어머니가 "몸에 좋다"며 권한 인분을 먹기도 했다.
정작 무서운 것은 허리에 박힌 파편이 아니었다. 가족을 잃었다는 슬픔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사고 이후 친정 어머니와 연락이 끊겼으며, 생명을 건진 배 속의 아들은 돌이 되기도 전에 굶어 죽었다.
"나는 우리 어머니를 편하게 모시지 못한 못난 딸이고, 내 자식을 굶겨 죽인 못난 엄마였지."
구 할머니는 "지금 일본 대지진이 당시 히로시마와 닮아 보인다"며 눈물을 흘렸다. 부모와 연락이 끊겨 대피소에서 우는 아이의 모습이나, 아이를 잃고 울부짖는 어머니의 모습을 TV에서 볼 때면 가슴이 북받쳐 오른다.
그는 자신처럼 많은 일본인들이 몸과 마음에 평생 '한'(恨)을 안고 살아가게 될까봐 걱정했다.
안월선(81) 할머니는 지독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히로시마 군인 배급소에서 쌀을 나눠주는 일을 했던 그는 16살 꽃다운 나이에 원폭 피해를 당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무너져 내린 콘크리트 건물 아래에 깔리고 말았다. 얼굴과 팔다리, 온몸에 유리 조각이 박혔지만 1주일간 치료를 받지 못했다. "사고 이후로 머리카락을 빗어도 아무런 감각이 없어. 철모가 내 머리를 꽉 누르고 있는 느낌이야."
◆ 대물림하는 '원폭 공포'
8살 때 히로시마에서 원폭 피해를 본 김일조(83) 할머니의 남편은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은 히로시마에서 40㎞ 정도 떨어진 군수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편은 사고 이후 몸이 가렵다며 이유 모를 고통에 시달리다 숨을 거뒀다. 김 할머니는 "3남 1녀가 있는데 자식들이 '머리가 아프다' '피부가 가렵다'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는다"며 "애들에게 항상 마음의 짐을 지고 산다"고 털어놨다.
이외판 할머니의 얘기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던 그날, 일본 군대에 군수품을 나르는 일을 하던 남편이 출근을 서두르지 않았다. "오전 8시 10분쯤이었어. 남편하고 아들하고 셋이서 아침을 먹고 있었지."
평화로운 아침을 깬 것은 갑자기 번쩍이는 섬광이었다. 순간 집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 할머니가 정신을 차려 무너진 건물을 헤치고 아들을 찾자 남편 품에 안긴 아들이 살아 있었다.
그해 9월 세 식구는 고향인 경남 합천으로 돌아와 구멍가게를 운영하며 살았다. 남편도, 아들도 별 탈 없이 잘 지냈지만 불행은 2세대에 걸쳐 찾아왔다. 아들이 결혼해 낳은 첫째 손녀는 손과 발을 못 쓰는 장애를 안은 채 세상에 나왔고, 둘째 손녀는 지적장애 진단을 받았다. 말로만 듣던 '원폭 후유증'이었다.
"두 손녀가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몸도 제대로 못 쓰고, 모두 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항상 마음이 무거워." 이런 상처 때문에 이 할머니는 현재 일본의 현실이 더 안타깝다. 대를 이어 전달되는 방사능의 공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방사능 후유증은 몇 세대까지 이어질지 알 수도 없고, 언제 어떤 병으로 나타날지 알 수도 없어. 피해 당사자가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이런 일이 안 생겨야 할 텐데."
TV를 보던 이 할머니는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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