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명→34명.' 포항제철고의 2011학년 대학 입시에서 2010학년도 대비 두 배 가까운 서울대 합격생을 내 화제다. 34명은 경북 지역 합격자 129명 중 26%에 해당하는 숫자. 대구(1위 대륜고 15명)와 경북을 통틀어서도 가장 많다. 특히 수시 전형에서 23명이나 합격자가 나온 점이 놀랍다. 최근 매년 수시 비중이 커지고 있지만 수도권 고교에 비해 수시에서 큰 성과를 올리지 못한 지역 고교의 사정을 고려하면 이 숫자는 놀라울 수밖에 없다. 포항제철고가 이처럼 뛰어난 입시 성적을 거둔 비결은 무엇일까.
◆학생, 교사들의 열정
"심화 과정이 포함된 수업 덕에 입시 부담을 덜죠."
포항제철고 3년생인 공동재 군과 강예영 양 모두 한목소리다. 동재는 포스텍(포항공과대) 교수들과 함께하는 심화 학습에서 만족감을 느낀다고 했다. 일반계 고교에서는 배우기 힘든 고급 수학, 물리 등을 들으며 천문학자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친구들과 천문학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별을 관측하고 얘기를 나누는 것도 신이 난다.
예영이도 동아리 활동과 교과 공부 모두 즐겁다. 밴드부에서 드러머로 활동하며 발표회도 가졌다. 예영이가 특히 좋아하는 과목은 영어. 아기자기한 수업 방법이 흥미를 더욱 자극한다. "영어 수업 시작 전 실시하는 '어휘 탐정' 시간이 특히 재미있어요. 한 단어의 어근을 찾은 뒤에 같은 어근을 쓰는 단어들을 찾아 함께 익히는 거죠."
포항제철고는 다양한 동아리 활동을 장려해 전국 규모 글쓰기 대회나 각종 경시대회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사회과학탐구반이 2009년 제2회 테셋(TESAT'시장경제에 대한 지식과 이해도를 측정하는 테스트) 고교생 경시대회에서 단체 대상을 받았고, 지난해 2월에는 기획재정부와 한국개발연구원이 공동 주최한 '제7회 전국 고교생 경제 한마당' 대회에서 우수상을 받는 등 여러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동아리 활동에만 열중하는 것이 아니다. 도서관의 불빛은 밤이 깊도록 꺼지지 않는다. 1'2학년의 경우 오후 11시, 3학년에게는 0시 30분까지 개방하는데 도서관 개방 시간이 끝나도록 자리를 지키는 학생들이 많다.
교사들도 힘을 보탠다. 교사들은 각 교과별로 교과서 외 교재를 만들어 제공하고 있다. 한 교과목을 가르쳐도 교사들이 세부 전공을 정해 수업을 돌아가며 맡는다. 가령 수학의 경우 1년 동안 한 교사가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통계, 미적분, 방정식 등 영역별로 수학 교사 네댓 명이 번갈아 수업을 진행하는 식이다. 김형기 연구부장은 "학생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 교사들도 스스로를 다시 한 번 채찍질하게 된다"며 "포항 고교 평준화 1기들이 2009년에 입학해 이번에 대입을 치르게 된 만큼 입시 결과에 대한 부담도 컸다. 이런 긴장감이 좋은 성과를 거둔 열쇠였던 것 같다"고 했다.
◆수시 강세의 열쇠, 전문교과 과정 운영
포항제철고가 대입 수시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둔 배경에는 특유의 '전문 교과 과정'이 있다.
대학과 연계한 수월성 교육프로그램인 HSP(Honors Students Program)와 R&E(Research & Education) 프로그램이 그것. HSP는 1학년생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교내 수학경시대회 성적과 수학교사의 추천으로 학생을 선발해 수학 영재로 키우고 있다.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 대학의 수학 교수 2명이 직접 대학 수준의 수학을 가르친다. 러시아어 전문통역이 학생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우수 학생은 연구 보고서까지 작성하도록 유도한다.
교내 과학경시대회 성적과 과학교사의 추천을 받은 2학년생은 R&E 프로그램에 참가할 수 있다. 학생 서너 명씩 한 조를 이뤄 포스텍 교수들의 지도 아래 수학, 물리, 화학, 생물, 컴퓨터공학 분야 등에서 각자 정한 테마로 연구 보고서를 직접 작성, 출간한다. 인문계열에서도 심화학습 후 개인별로 연구 보고서를 쓴다. '포항시 교통 네트워크 분석' '사이토카이닌이 굴지성에 미치는 영향:수송체와의 관계' '멜서스의 유효 수요 이론과 비례원칙' 등이 지난해 학생들이 작성한 대표적 연구 보고서다.
과학, 수학 외에 토론, 영어, 논술 등 다양한 교내 경시대회도 학생들의 성취감을 북돋우고 있다. 필독 도서 목록(100권)을 선정해 분기별로 독서 실적을 점검하는 등 독서 이력 쌓기에도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학교 측은 이 같은 프로그램들이 사교육의 도움 없이도 학생들의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고 분석했다. 특히 수시에서 주요 전형으로 떠오른 입학사정관제가 확대될수록 이런 비교과 활동들이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 교사들은 입시 전문가가 다 됐다. 신입생이 졸업할 때까지 교사도 함께 학년을 올라가기 때문에 학생 개개인에 대한 장단점 분석이 용이하다. 이런 분석은 입시 성과로 직결되고 있다. 각 학생의 3년간 고교 생활과 진학 준비 과정을 꿰뚫고 있기 때문에 일찌감치 진로를 정하는데 도움을 주고 어떤 입시 전형에 대비할 것인지 학생 개개인과 수시로 의견을 나누고 있다.
3학년 부장 전동구 교사는 "일찌감치 대입 전형 변화에 대비해 HSP와 R&E 등 전문교과 과정을 개설, 1학년 때부터 이수하도록 한 것이 이번 입시에서 서울대 34명, 연세대와 고려대에 76명이 합격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재단의 풍부한 지원도 한몫
'교육보국(敎育報國)의 정신 아래 자주인'도덕인'창의인을 육성한다'는 기치를 내건 포스코교육재단의 물밑 지원은 포항제철고에 든든한 힘이 된다.
올해 창립 40돌을 맞은 재단은 현재 포항과 광양에 유치원부터 고교까지 모두 12개 학교를 운영 중이다. 지난해 포스코는 재단에 350억원을 지원했고 이는 각 학교가 커나갈 수 있는 자양분이 되고 있다.
특히 1981년 문을 연 포항제철고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포스코 못잖게 공교육의 모델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자사고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재정 확보가 필수적이다. 포항제철고가 타 자사고보다 유리한 환경에 있는 것도 든든한 재단의 지원 덕분. 학교 운영비 가운데 80%가량을 재단에서 부담한다. 자사고는 일반계 고교 학비의 300%까지 받을 수 있으나 포항제철고는 일반계 고교와 학비 수준이 비슷하다. 장학금도 재적생의 80% 내외까지 혜택이 돌아간다.
대학 입시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과 우수한 시설 역시 풍부한 재단 지원으로 이뤄낸 것. 연중 국내외 교수를 초빙해 특강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학생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다. 도서관 열람실은 1인 1좌석제로 전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학교 측은 "별도의 특기 적성비가 있긴 하지만 사교육비와 비교하면 아주 저렴한 수준"이라며 "교육 프로그램의 질이 높아 별도의 사교육 없이도 진학에 큰 무리가 없다"고 했다.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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