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타임레터

대학 3, 4학년 강의를 진행하다 보면 개강 때의 초발심이 무너져 가끔 실기실 분위기가 복잡 미묘해지곤 한다. 이때쯤이면 나는 기억지도와 나침반 이야기를 꺼낸다.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자신의 삶에 침전된 것들은 일일이 메모해 두라고 한다. 덧붙여서 그것을 찾아갈 나침반을 마음 깊이 간직하라고 말해준다. 그렇게 하는 까닭은 비록 일상의 폭풍우가 삶의 좌표마저 위태롭게 하는 시기가 온다 해도 처음 그림 공부를 할 때 세운 목표 지점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그 다음에 주로 연필과 지우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제 몸을 깎아내며 타인의 실수를 지우고 고쳐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삶은 지우개로부터 배울 일이다. 나아가 쓰레기통에 깎아버린 흑연가루는 아무 쓸모가 없지만 화면 위에 칠해진 그것은 예술작품이 되는 이치, 즉 연필처럼 쓰임에 따라 확연하게 달라지는 사물의 효용성을 본받자고 말한다.

여기에다 노동과 운동에 대해 강조하곤 한다. 둘 다 땀 흘려 몸을 쓰는 일이지만 노동은 돈을 벌면서도 괴로워하는 사람이 많다. 반면 운동은 돈을 쓰면서도 즐거워한다. 이처럼 몸이 움직이는 목적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정신이 받아들이는 가치 척도가 전혀 달라진다.

사실 몸은 주변 환경에 아주 정직하게 반응한다. 다만 정신이 과도하게 통제하려 하거나 변덕을 부리기 때문에 많은 불협화음이 발생하는 법이다. 그래서 정신을 담는 그릇을 소중하게 대하고, 몸의 솔직한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라고 권한다.

마지막으로, 예술가는 미래를 예언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최소한 예측하며 살아야 한다고 톤을 높인다. 창조적 사고란 새로운 것을 드러내는 통로이므로 결국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일과도 맞물려 있다.

그래서 예술가가 되기 위한 출발선을 넘어선 현 지점에서 3, 4년 후의 시공간을 걸어갈 자신을 향해 정중하게 편지를 쓰게 한다. 늘 미래의 또 다른 나에게 말 걸기를 게을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래야 장차 세상 어느 곳으로 달려가더라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맞물린 자신과 동행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자신을 진실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나는 잠시나마 그들의 인생에 끼어든 인연으로 학생들이 미래에 받아볼 주소를 적어 밀봉한 타임레터를 보관한다. 그 후 약속한 해가 되면 일제히 우표를 붙여 돌려보낸다.

그들이 나침반을 잃었는지, 세상 한 곳의 연필과 지우개가 되었는지, 또한 몸과의 대화가 순조로운지는 과거 어느 해 자신이 보낸 편지를 받아든 그들의 기쁨에 찬 메아리를 들어보면 훤히 알 수 있다. 내 수업도 그때 비로소 종강을 한다.

이영철(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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