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걸 '일본의 재발견'이라고 해야 할까. 최근 강진과 원전 사고로 국가 비상사태를 맞은 일본 국민들에 대해 전 세계인의 호감이 쏟아지고 있다. 전기, 통신, 교통 등 사회 기간망이 올스톱된 폐허에서 보여준 일본 국민들의 침착함과 자제력에 대해서다. 대재앙에도 허둥지둥대지 않고 매뉴얼에 따라 차분히 상황을 추스르는 모습에서 일본의 저력을 새삼 느낀다. 바다 건너 우리로서는 부러울 따름이다. 물론 감당할 수 없는 한계랄까, 임계점(臨界點)을 넘는 순간이 오면 훈련된 자제력이나 매뉴얼도 한계를 맞게 된다. 실제 원전 사고가 장기화 조짐을 보이면서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도 생필품 사재기가 나타나고 있고, 정부의 안이한 초기 대응을 성토하는 비난도 높아지고 있다. 리더십의 부재라는 비판도 떠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방향을 정하면 무서우리만치 집중력을 보여주는 그들의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비약이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일본을 보면서 갈팡질팡하는 우리나라의 대학 입시 제도를 생각해본다. 최근 교육과학기술부 주도로 진행된 입시 정책 수정은 큰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단기적인 매뉴얼은 고사하고, 장기적인 방향성도 찾기 어렵다.
논술 한 가지만 하더라도 그렇다. 교과부는 논술이야말로 창의적 인재를 기르는 가장 교육적인 수단이라고 선전해왔다. 대학들은 경쟁적으로 논술 비중을 높였다. 불과 작년 연말까지의 일이다. 그런데 교과부가 손바닥 뒤집듯 정책을 바꿨다. 논술이 사교육을 부추긴다며 논술 폐지를 요구하고 나섰다. 따라오지 않으면 대학 지원금(교육역량 강화 사업)에서 불이익을 주겠노라고 무언의 압력을 넣었다. 그러자 각 대학들이 논술을 폐지하거나 비중을 축소했다. 올해 수시가 불과 다섯 달 앞으로 다가왔는데 교과부 지침에 맞추느라 각 대학마다 지난해 11월 발표했던 입시안을 부랴부랴 수정하고 있다. 경북대의 경우 2012학년도 수시에서 논술 비중을 더 확대하겠다고 공언했지만, 교과부의 헛기침에 돌연 폐지를 선언했다. 경북대 논술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에 가장 충실한 논술로 정평이 나 있다. 사교육 조장의 책임이 있는 수도권 일부 사립대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다. 그런데도 불과 수시 몇 개월을 앞두고 아예 폐지됐다. 피해는 정부와 대학의 말만 믿은 학생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고 있다. 대학들의 이런 행태는 고등교육법 시행령을 위반한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대입 간소화도 그렇다. 언제는 다양한 인재를 뽑으라고 해 전형 수를 늘리게 해놓고 이제는 전형이 너무 복잡하다며 대학들에게 간소화를 요구하고 있다. 뒤늦은 개선이라도 마냥 반갑다라고 해야 할까.
교과부는 논술 폐지로 사교육 비중이 늘지 않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논술만의 유형에 한정된 것일 뿐 논'구술과 심층면접 등 다른 대학별고사는 강화될 수밖에 없다. 어쨌든 대학으로서는 우수인재를 미리 확보하기 위해 변별력 있는 테스트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교육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게 뻔하다.
오후 10시 이후 학원 교습을 제한한 조치도 비슷한 맥락이다. 당장 사교육은 감소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학원들은 주말반 수업을 대폭 늘리고 있다. 오후 10시, 11시까지 강제 자율학습을 하는 학교의 학생들은 주말에 몰아서 학원을 가거나, 아예 심야 과외를 듣는다. 어느 개인 학원장은 심야 과외를 해달라는 곳이 많아서 수입은 학원 운영 때보다 더 나을 것 같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쉬운 수능도 그렇다. 영역별 만점자 비율을 1%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EBS 강의·교재 연계율을 70%로 확보하겠다고 한다. 수능이 쉬워지면 변별력 약화는 불가피하다. 만점자가 많아지면 다른 전형 요소로 우열을 가려내야 한다. 주요 대학들은 대학별 고사를 더욱 강화하려 할 것이다. 특히 수시 모집에서는 본고사형 시험의 필요성이 더욱 높아지게 된다. 본고사 유형이 사교육을 부추길 가능성은 더 높다. 만점자 1%, EBS 연계율 70%가 과연 실현 가능할지도 의문이다. 지난해 2011학년도 입시에서 수험생들은 EBS만 믿었다가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경험이 있다.
일본에 닥친 지진은 천재지변이지만 우리 입시 제도의 혼란은 인재(人災)라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백년대계는 고사하고 일년 앞에 장담하지 못한대서야 교육강국이라는 구호가 부끄럽다.
최병고 기자(사회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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