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갈 길을 가라, 남이 뭐라든!"-단테.
형! 지난 일요일, 형을 만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이 말을 떠올렸습니다. 1985년, 소리 없이 목련이 지던 교정에서 형은 후배들에게 절규했지요. "이 사회에서 더 이상 아이들에게 윤리를 가르치는 일은 죄악이다." 그리고 얼마 뒤에 교사 자리를 그만두고 형은 공장의 노동자로 들어갔었지요. 마르크스가 17살 때 프리드리히 빌헬름 김나지움 졸업 논문 '직업 선택에 관한 한 젊은이의 성찰'에서 "노예 같은 도구로 일하기보다 자기 영역에서 독립하고 인류에 봉사할 수 있는 분야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가끔 아이들을 가르칠 때보다 더 반짝이던 눈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 노동자임을 강조하던 형의 얼굴을 기억합니다. 형이 가진 신념이 분명 '인간에 대한 예의'임을 믿었고 그것이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얻어야만 했던 삶의 지표라는 것은 너무나 명확한 것이었지요. 그래요. 형은 어느 겨울, 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 사람을 업어 파출소에 데려다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노동조합과 관련해 수배령이 떨어진 몸으로도 말입니다.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들끼리 이견이 생겨 운동을 잠시 쉴 때, 형은 자신의 공부가 부족하다며 다시 '자본론'을 몇 번이고 정독하던 우직함을 보여주었지요. 세상이 형에게 가하는 편견과 질시는 너무도 가혹했지만 형은 마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오히려 더 뜨겁게 세상을 끌어안으려고 노력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때로는 같은 길을 간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정치권으로 옷을 갈아입거나 사회단체라는 곳에서 명망을 얻어 갈 때에도 형은 늘 제자리에서 노동자로서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지요.
그러던 형이 조카를 군대에 보내고 나서 지난 일요일 처음으로 아픔을 말하더군요. "결코 부끄럽게 세상을 살진 않았지만 아들과 집사람에게만큼은 미안하다." 아마도 그럴지 모릅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가지지 못한 것이 얼마나 짐이 되는지 형은 조카를 통해서 보았을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히 잘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직은 조카 또한 깨닫지 못했겠지요. 그래서 평생을 세상의 불의와 편견과 맞서 싸워온 아버지와 어머니를 원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 깨닫게 될 겁니다. 세상의 가치가 단지 물질만으로 계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때 조카는 아마 형이나 형수가 살아온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지 가슴에 새기게 되리라 믿습니다. 다시 봄이 오고 목련이 싹을 피우겠지요. 형이 오늘도 그 길을 가고 있듯이 말입니다. 30여 년을 노동자로 살아온 형과 형수에게 이 정도 위로밖에 할 수 없음이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전태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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