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새끼니까 내가 키우는 거지."
21일 오후 대구의 한 병원에서 만난 이선희(가명'67'여) 씨는 침대에 누워있는 손자 류민수(가명'22) 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자는 불러도 대답이 없다. 22년간 단 한번도 따뜻하게 '외할머니'라고 부른 적도 없다. 밥을 먹는 것도, 화장실을 가는 것도 이 씨의 도움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민수 씨다.
민수(지적장애 1급) 씨는 얼마 전 간질 발작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세상과 격리된 그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외할머니 이 씨다.
◆1세 지능, 22살 몸
"얘가 무슨 죄가 있어. 이렇게 태어난 게 저놈 죄는 아니잖아."
가족들이 민수 씨의 장애를 알아차린 것은 돌이 되기 직전이었다. 아장아장 기어다니는 아기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다."그 작은 애가 하루종일 몸을 부들부들 떨길래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병원에 갔죠. 하루 이틀 치료 받으면 병이 나을 줄 알았는데."
불행은 간질에서 끝나지 않았다. 아이의 이상한 행동이 지속됐다. 제대로 걷지 못했고, 세 살이 됐는데도 말을 하지 못했다. 아들이 비정상이라고 생각했던 부모님은 병원에 데려갔다가 지적장애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 무렵 여동생이 태어나자 민수 씨 부모님은 힘든 결정을 내렸다.
"민수를 장애인 시설에 보내겠다고 하잖아요. 아무리 부족해도 내 피가 섞인 손잔데, 차라리 내가 키운다고 그랬어요." 그때부터 민수 씨는 부모님 곁을 떠나 외할머니와 함께 살게 됐다.
민수 씨에게 잠깐이라도 눈을 떼면 돌발 상황이 발생한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예전에는 문만 보면 뛰쳐나가는 습관 때문에 이 씨가 애를 먹었다. 잠깐 다녔던 초등학교에서도 똑같은 일이 이어졌다. "남들 다 다니는 학교에 손자도 다녀야 한다"며 이 씨는 민수 씨를 덕희학교(지적장애인 특수학교)에 보냈다. 하지만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은 고사하고 사람들과 대화가 불가능한 민수 씨가 학교를 다니는 것은 무리였다. 수업 시간에도 수시로 바깥으로 뛰쳐 나갔고, 결국 1년도 못가 학교를 그만두고 외할머니 품으로 돌아왔다.
175㎝가 넘는 키에 85㎏ 몸무게, 몸집만 보면 어른이지만 민수 씨는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어린 아이다. 휠체어에 의지해 생활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어릴 때부터 항상 까치발로 걸어다녔던 민수 씨는 언제부턴가 무릎으로 기어다니기 시작했다."그러니 내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지."
◆부족한 장남
평범한 가정을 꿈꿨던 민수 씨 가족의 꿈은 장남의 장애로 인해 산산조각이 났다. 넉넉한 형편이었다면 아들을 품었겠지만 그들 가족에게 그럴 여유는 없었다."세 식구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데 어떻게 민수한테 온 신경을 쓰면서 살겠어요." 이 씨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엄마 김순애(가명'42) 씨가 가끔씩 민수 씨를 보러 친정집을 찾을 뿐, 여동생(20)도, 아버지(43)도 오빠와 아들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다.
민수 씨 아버지는 소금 배달 일을 한다. 트럭에 소금을 가득 싣고 경북과 대구 지역을 이리저리 돌아 다닌다. 그렇게 한달에 130만원을 벌어 세 식구를 먹여 살린다. 어머니 김 씨는 3년 전 대장암 수술을 받으면서 제 몸을 스스로 가누기 힘들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여동생도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이런 형편 탓에 24시간 관심이 필요한 민수 씨를 돌보는 것은 무리다.
민수 씨가 받는 정부 보조금은 한달에 9만원씩 나오는 장애인 연금이 전부다. 지난해까지 민수 씨는 차상위계층으로 인정받아 14만원을 지원 받았지만 지금은 그것마저 사라졌다. 민수 씨 명의로 배기량 2천900cc 차량이 '대포차'로 등록돼 있기 때문이다. 대소변을 못가려 기저귀를 차고, 걸음도 못 걷는 민수 씨가 운전을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만 서류상 남은 기준은 냉정했다. 이 때문에 기초생활수급자인 외할머니의 생계급여 40여만원으로 두 식구가 힘든 삶을 이어가고 있다.
◆"내가 죽을 때까지 키워야지"
병원 침대에 엎드려 있던 민수 씨는 갑자기 노란색 노끈을 손에 잡았다. 머리 위로 노끈을 '빙빙' 돌리고 이리 저리 살피는 모습이 꼭 두 살짜리 아이 같았다. "얘는 어릴 때부터 노끈에 집착했어요. 노끈이 자기 손을 떠나면 난리가 난다니께. 그러니 이 병원에도 노끈을 들고 왔지요."이 씨는 노끈을 손에서 놓지 않는 민수 씨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민수 씨가 온기 없는 딱딱한 노끈에 집착하는 것도 가족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인 것만 같아 이 씨의 마음이 더 시리다.
하루 종일 민수 씨를 돌보면 지칠만도 한데 이 씨는 지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 뒤 손자의 훗날을 걱정했다. 20년 전 대장암 수술을 받고도 끝까지 생의 끈을 부여잡은 것도 혼자 남겨질 손자 때문이었다. 이 씨는 가진 것이 별로 없다. 33㎡ 남짓한 두 칸짜리 방과 허리 굽은 자신의 몸이 전 재산이다. 말도 못하고, 대소변도 못 가리고, 할머니를 품어주지 못하는 어린아이 같은 손자지만 이 씨에게는 자기 인생을 바쳐 지켜주고 싶은 소중한 가족이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이웃사랑 계좌는 '069-05-024143-008(대구은행), 700039-02-532604(우체국) ㈜매일신문사'입니다.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