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가재 잡던 기억이 참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나를 사로잡는다.
맑은 계곡의 돌이 햇빛에 달궈져 물에 일렁거렸다. 계곡 양 옆에 늘어선 녹음(綠陰)까지 물에 내려앉아 달궈진 햇살과 함께 나를 현기증 나게 했다.
그 어지럼증은 돌을 들어 올릴 때 절정에 달했다. 가재는 늘 어둔 돌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돌을 들 때 그 긴장감은 바위에 스며드는 햇빛처럼 쨍했다. 매미소리와 졸졸 흐르는 물소리도 들리지 않고 온통 일렁거리는 윤슬과 차가운 물의 느낌, 그리고 가재의 존재에만 집중됐다. 큰 놈은 돌처럼 어둔 몸으로 물빛인지, 자갈 빛인지 모르게 몸을 웅크리고 있었는데, 마치 오랜 세월동안 나를 기다린 듯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혹시 물의 흔들림이 간파될까 어린 손으로 조심조심하던 그 가재잡기의 흥분은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나를 자극한다.
많은 사람들은 필자의 아이디에 관심을 나타냈다. 필름통(filmtong). 필름이 들어있는 통이다. 쓰레기통, 필통, 쌀통, 여물통…. 통(桶)하면 대부분 일정한 뭔가를 모아놓은 보관함같은 것이다. 필자의 경우는 온갖 소소한 물건들을 영화 필름통에 넣어 둔다. 본편이 든 영화 필름통은 크지만 예고편 필름통은 지름 18cm에 높이 5cm 정도의 알루미늄 재질의 납작한 원통이다.
그 속에는 동전도 있고 귀이개도 있고, 손톱 깎기, 만년필 잉크, 나사, 지우개, 건전지 등 요긴한 물건들을 넣어 두어 필요할 때 꺼내 쓴다. 삶에 영향을 미칠 물건을 아니지만, 없으면 불편한 그런 것들이다. 그런데 그런 필름통이 몇 개 되다 보니 어느 통에 뭐를 들어있는지 열어보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 이 통인가? 아닌가? 이 통에 뭘 넣어두었지? 열 때마다 긴장감이 돈다. 마치 어린 시절 가재 잡던 그 느낌처럼 말이다.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영화들을 보았고, 지금도 1주일에 5편 이상은 보고 있다. '블랙 스완', '아이 엠 러브'(사진)처럼 감동적인 작품은 물론이고 감독 이름도 없는 싸구려 영화도 빼놓지 않고 보는 편이다. 참 많은 영화와 영화감독들이 내 속, 또 다른 필름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서사적인 데이비드 린, 서스펜스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 짓궂은 데이빗 린치, 영상에 시를 쓰는 빔 벤더스,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같은 세르지오 레오네, 한 성질 하는 스탠리 큐브릭, 수다쟁이 우디 앨런, 총 쏘던 긴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스크린에 달콤한 케이크를 발라 준 스티븐 스필버그….
캄캄한 영화관에 앉아 영화사 로고가 시작될 때마다 느낀 긴장은 쨍한 여름날의 가재잡기같은 것이었다. 필름통 속에는 그런 긴장감이 들어있다. 늘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그래서 행복한 나의 필름통… .
김중기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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