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성국제연날리기대회] 전통연, 언제부터 날렸을까

이순신 장군, 임란 때 섬과 육지 통신에 이용

연날리기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널리 퍼져 있는 민속놀이다. 우리나라 연날리기는 정월 초하루부터 시작해 대보름날에 절정을 이룬다. 연을 날리면서 '송액영복'(送厄迎福) 즉 '액을 쫓고 복을 맞아들인다'는 뜻의 축문을 써서 하늘 높이 날린다. 연을 날리다가 얼레에 감긴 실을 다 풀어 멀리 날려 보내는 '액연 띄우기'를 했다. 그 해의 재액을 멀리 쫓아 보내기 위함이다.

◆연의 역사

연에 대한 표현은 각국마다 다르다. 한국은 연(鳶'솔개), 영어로는 카이트(Kite), 일본은 다코, 중국은 펑쩡으로 부른다.

서양은 기원 전 400년대에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Platon)의 친구인 알타스(Altas)가 연을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동양에서는 중국 한나라 때 명장 한신이 만들었다는 기록이 송나라 고승의 '사물기원'에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는 원래 군사적 목적으로 연을 사용했었다. '삼국사기'에 신라 진덕여왕 원년(647년) 비담과 염종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김유신 장군이 큰 연을 만들어 불을 붙인 뒤 하늘로 날려 보내 민심을 수습했다고 한다. 고려 말에는 최영 장군, 임진왜란 때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섬과 육지를 연락하는 통신수단의 방편으로 연을 이용했다.

주로 군사적인 목적에 많이 사용되던 연은 18세기 이후 민간으로 대중화된다. 영조대왕은 연날리기를 좋아하여 즐겨 구경하고 장려하여 서기 1725~1776년 무렵에는 우리나라에 연날리기가 널리 민중에 보급되어 일반화되었다고 한다. 광복 후 처음으로 1954년에 민족정신을 계승하자는 뜻에서 정부가 정책적으로 연날리기를 장려했다. 당시 문화공보부에서 전국의 연 기능 보유자들을 수소문하여 연날리기 대회를 열었다. 그 후 1956년 한국일보사 주최 제1회 전국 연날리기 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도 매년 대회장에 나와 관전도 하고 연도 날리며 연에 대한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고 한다. 이때부터 연에 대한 국민의 관심도 높아져 연을 수집하거나 제작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연날리기

연날리기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즐긴 가장 대표적인 겨울철 놀이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연을 날리는 시기가 섣달부터 정월 보름 사이로 고정됐다. 이는 한국의 농경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농번기에 연날리기를 하면 농사에 지장을 줄 것이므로 농한기인 음력 12월부터 연을 날리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즉, 정월보름날 액막이의 민속과 관련시켜 연을 날려 보냄으로써 연날리기를 끝내고, 다시 농사 준비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연날리기가 취미 생활로 변하면서 강변 등 넓은 공간과 알맞은 바람(초속 3~5m)만 있으면 연중 어느 때라도 연을 날린다.

◆연의 종류와 묘기

가오리연과 방패연이 대중적이다. 요즘은 연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나비연, 거북선연, 봉황연, 박쥐연, 학연, 매연 등 수많은 창작연을 선보이고 있다. 특히 수십 개의 연을 연결하여 하늘 높이 띄우는 '줄연'의 묘기는 보는 사람의 감탄사를 연발하게 만든다. 일본'중국'태국 등의 연은 그냥 공중에 떠있거나 잠깐 떠있다 내려올 뿐이지만, 우리나라 연은 자유자재로 공중곡예를 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연날리기 놀이엔 높이 띄우기, 재주부리기(급강하, 급상승, 급전), 끊어먹기 등이 있다. 연 끊어먹기 놀이에는 이긴 편이 진 편에게 한턱 내는 아름다운 풍속이 있다.

이홍섭기자 hslee@msnet.co.kr

사진'안상호 편집위원 shah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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