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日 시민의식'에 찬사, 한국서 큰 재해 발생했다면? "……"

우리 사회 배려 문화를 키우자

엘리베이터에 몸이 끼이는 사고는 다른 사람을 위해 엘리베이터를 잡아주는 배려심만 있으면 겪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엘리베이터에 몸이 끼이는 사고는 다른 사람을 위해 엘리베이터를 잡아주는 배려심만 있으면 겪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배고픔과 사투를 벌이면서도 음식을 보고 달려들기는커녕 다른 사람을 걱정하며 서로 양보하는 대피소 풍경. 오니기리(일본식 주먹밥) 하나로 한끼를 때우면서 "내 인생 최고의 오니기리였다"고 말하는 중년 남성. 구조대를 보고 자신의 부상은 경미하니 다른 사람부터 구조하라고 말한 중년 여성. 원망하거나 항의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유가족들. 더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을 위해 기꺼이 슬픔을 삼키는 이재민들.

자신의 몸조차 추스르기 힘든 아비규환 속에서 일본인들이 보여준 수준 높은 시민 행동들이다. 보는 사람에게 경외감을 불러 일으키는 일본인들의 이런 행동에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자리 잡고 있다.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행동들이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의 성숙한 시민의식에 세계는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 외국의 한 언론은 "인류가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했다. 과거사 청산 또는 영토분쟁으로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해 온 한국과 중국 국민조차 일본인들의 행동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대지진과 쓰나미 공포 속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인간애를 발휘한 일본인들의 행동은 우리에게 시시하는 바가 크다. 인정이 메말라가고 있는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주소

출근을 위해 아파트 주차장으로 간 이진우(42) 씨. 자신의 승용차 옆에 주차된 차를 보고 기분이 상했다. 바짝 붙인 옆 차 때문에 차를 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씨는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탑승한 뒤 몸을 잔뜩 웅크려 운전석으로 넘어간 뒤에야 겨우 차를 몰고 주차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출근길에서도 황당한 일을 당했다. 거침없이 도로를 역주행하는 자전거 때문에 차를 멈추고 자전거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오늘 왜 이러지?" 불길한 예감을 갖고 직장에 도착한 이 씨. 이번에는 엘리베이터에 몸이 끼는 일을 당했다. 엘리베이터 안에 많은 사람이 타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엘리베이터를 잡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씨뿐 아니라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다. 하지만 타인에 대한 배려가 있었다면 누구나 겪지 않을 일이다.

길거리에 나서면 우리사회에서 배려문화가 점점 사라지고 있음을 쉽게 체감할 수 있다. 공공장소에서 시끄럽게 떠들거나 지하철 또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큰 소리로 휴대전화 통화를 하는 사람을 흔히 목격할 수 있다. 흡연금지 구역에서 버젓이 담배를 피우고 담배꽁초나 휴지를 길거리에 버리는 것은 예사다.

특히 교통문화를 보면 배려문화가 최악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출퇴근 시간 교통량이 많은 교차로에서는 조금이라도 빨리 지나가려는 차량들이 서로 얽혀 북새통을 이룬다. 외길에서 자동차끼리 마주치면 길을 비켜주지 않기 위해 신경전부터 벌인다. 앞 차가 방향지시등을 켜고 차선을 바꾸려고 하면 속력을 올려 끼어들지 못하게 간격을 없애버리는 운전자도 있다.

불법 주정차도 다반사다. 단속을 피하기 위해 번호판을 가리는 뻔뻔스러운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다가구주택이 밀집한 동네 골목길에서는 주차 때문에 경적과 고성이 그치질 않는다. 주차선을 물고 주차하는 바람에 다른 차량이 주차를 할 수 없도록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이중주차를 하면서 연락처 없이 주차 브레이크까지 잠가 놓아 폐를 끼치는 운전자도 있다. 화물차와 시내버스의 난폭 운전은 여전하고 아무데나 정차하고 출발하는 택시 때문에 교통 흐름이 방해 받는 경우도 허다하다. 일부 오토바이 운전자는 차량 사이를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는 것도 모자라 인도 위를 질주해 행인들까지 놀라게 한다.

배려 실종 현상은 교통분야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다. 결혼이주여성과 외국인 노동자를 무시하는 행동은 다문화사회로 접어든 한국에서 새로운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타인에 대한 배려 없는 행동은 온라인 상에서는 도를 넘고 있다. 타인을 비방하거나 근거 없는 루머를 양산해 피해를 주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불거진 가수 타블로 학력 논란이다. 타블로가 미국 스탠퍼드대학을 졸업했다는 증거를 제시해도 의혹은 숙지지 않았다. 급기야 타블로가 명예훼손 혐의로 누리꾼 22명을 고소하고 경찰이 스탠퍼드대를 졸업한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겨우 잠잠해졌다.

타인보다 자신이 우선인 문화는 큰 참사를 부르기도 한다. 2008년 발생한 서울 논현동의 한 고시원 방화'살해 사건은 극단적 이기주의가 원인이었다. 사회에 불만은 품은 범인이 불을 지른 뒤 화재를 피해 복도로 뛰쳐나오는 피해자들을 향해 흉기를 휘둘러 13명의 사상자를 냈다. 2005년에는 상주시민운동장에서 11명이 압사하고 70여 명이 부상하는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 유명 연예인이 출연하는 콘서트를 보기 위해 몰린 5천여 명의 관객들이 좁은 출입문으로 한꺼번에 몰리면서 끔찍한 사고로 이어진 것이다.

◆한국에서 대형 재해가 발생한다면

만일 우리나라에서 강진이나 쓰나미 피해가 발생했다면 우리의 모습은 어떻까. 가정에 기초한 까닭에 구체적인 모습을 그려내기가 쉽지 않지만 일본인들처럼 타인을 배려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 일본만큼 배려 문화가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상상황에 대처하는 한국인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간접적인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최근 실시간 주부 검색어 1위로 떠오른 것이 일본내수용 기저귀다. 대지진 여파로 기저귀 공급이 여의치 않을 것으로 판단한 한국 주부들이 일본산 기저귀를 사재기 했기 때문이다. 일본 원전사태 여파로 방사선 피폭 예방효과가 있다는 요오드 공동구매도 한창이다. 몰리는 주문에 요오드 가격이 2배 정도 폭등했다고 한다.

사재기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조금만 불안하면 어김없이 사재기가 기승을 부린다. 최근 물가 불안이 이어지자 식료품 사재기 현상이 나타났다. 2008년에는 라면 가격이 인상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미리 사 놓으려는 고객들이 몰리면서 일부 대형마트의 경우 품귀 현상까지 빚어졌다. 게다가 온 국민이 고통분담을 해야 할 시기였던 IMF 외환위기 당시에도 사재기는 있었다. '요즘 식품점들의 반은 텅 비어 있다. 구매자들이 몰려들어 진열대에 남아있던 상품들을 닥치는 대로 사들이고 있다. 비누와 국수가 달리고 설탕은 동이 났다.' 한국의 IMF 사태를 취재했던 러시아 일간지 코메르산트 데일리의 안드레이 바실렌코 기자가 작성한 기사의 서두다. 유례없는 재난 속에서도 꼭 필요한 물건만 구매하고 타인을 위해 생필품을 남겨 놓는 일본인들의 태도와 사뭇 다름을 느낄 수 있다.

◆배려 문화 왜 실종됐나

'종신양로 불왕백보'(終身讓路 不枉百步)라는 말이 있다. 조선시대 아이들이 배우는 기초 교과서인 '사자소학'에 나오는 글귀로 '평생 길을 양보해도 그 손해는 불과 백보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양보를 최고의 미덕으로 존종해 왔던 우리 사회에서 배려 문화가 실종된 것은 급속한 산업화의 영향이 컸다. 괄목할 만한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는 과정에서 '빨리 빨리'로 대변되는 성과제일주의 문화가 한국인을 지배하는 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빠른 시간 내 성과를 내야 하다 보니 양보는 곧 손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배려 문화는 점차 설 땅을 잃게 됐다.

또 낮은 출산율과 부모의 과잉 보호도 원인으로 꼽힌다. 형제들과 부대끼며 자연스럽게 나눔의 지혜를 터득했던 예전에 비해 요즘 아이들은 혼자 모든 것을 차지하며 부족함 없이 자란다. 타인에 대한 배려보다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방향으로 인격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 배효덕 대구향교 전교는 "사회가 급변하면서 가치관도 급변했다. 정신을 중시 여기던 사회에서 물질을 중시 여기는 사회로 바뀌면서 세상이 각박해졌다"고 지적했다.

◆배려문화를 키우자

전문가들은 이번 일본 대지진을 통해 한국인은 일본인들이 보여준 배려의 미덕을 배워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일본의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한국에도 배려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것. 전문가들은 배려문화를 키우기 위해서는 교육이 중심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릴 때부터 가정과 학교에서 남을 배려하는 교육을 철저히 하지 않으면 배려문화가 정착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일본인들의 높은 시민의식 뒤에도 100년 국민교육의 힘이 있다고 분석한다. 서정완 한림대 일본학연구소장은 "일본의 민족성이 남다르기 때문에 공동체 의식이 강한 것이 아니라 학교 교육과 가정 교육에 많은 투자를 했기 때문이다. 전후 패전국으로서 혼란스러웠던 나라를 다시 일으켜세우기 위해 일본이 가장 주목한 것은 바로 교육이었다. 배려문화는 교육을 통해 일본인들의 몸에 밴 것"이라고 말했다.

또 배려의 가치가 존중받는 사회 분위기를 정착하는 것도 필요하다. 허창덕 영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어느 순간부터 남을 위해 희생하고 배려한 사람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일에 우리 사회는 인색해졌다. 이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산업화를 겪으면서 생존에 필요한 물질이 최고의 가치로 군림하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5일 만에 일본인 돕기 성금이 100억원 이상 모금될 정도로 우리 국민성 속에는 배려의 문화가 잠재돼 있다. 이를 효과적으로 이끌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사진 우태욱기자 wo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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