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3년 끌던 의료분쟁조정법 통과…하지만 '절반의 성공'

의료분쟁은 의사 입장에서도 큰 부담이 되는 문제일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시민단체에서는 의료분쟁 발생시 신속하고 안정적인 보상을 위해 책임
의료분쟁은 의사 입장에서도 큰 부담이 되는 문제일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시민단체에서는 의료분쟁 발생시 신속하고 안정적인 보상을 위해 책임'종합 보험제도 도입을 주장하고 있지만 이번 법안에서는 이런 내용이 빠져 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계 없음.
23년 만에
23년 만에 '의료분쟁조정법'(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말많고 탈많던 의료분쟁 해결에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입증책임 등의 허점이 많아 과연 의료사고 피해자들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다. 사진은 의료사고 문제를 다뤘던 하얀거탑의 한 장면.

23년 만에 '의료분쟁조정법'(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이 3월 국회를 통과하면서 말많고 탈많던 의료분쟁 해결에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게 됐다. 지금까지는 소송을 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지만 앞으로는 조정을 통해 분쟁을 해결할 수 있게 된 것. 특히 환자의 경우에는 길면 몇 년씩 걸렸던 소송 기간을 단축할 수 있는데다, 자료 수집 등 의료과오를 입증하는 과정 상당부분을 조정위원회에서 맡게 돼 조금 더 쉽게 억울함을 풀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평가다. 하지만 여전히 가야할 길은 멀다. 기나긴 표류를 끝내고 겨우 첫걸음을 내디뎠지만 아직 세부 규칙을 만들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보완해야 할 점들이 많기 때문이다.

◆어떻게 바뀌나?

의료분쟁조정법은 1988년 대한의사협회가 의료사고처리 특례법 제정을 건의하면서부터 도입 논의가 진행됐다. 그리고 국회는 11일 본회의를 열고 재적의원 233명 가운데 찬성 223명, 반대 1명, 기권 9명으로 의료분쟁조정과 피해구제를 위한 제정법을 23년 만에 통과시켰다. 국회를 통과한 의료분쟁조정법은 대통령 승인을 받아 공포되면 1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이르면 내년 4월부터 시행된다.

이번에 통과된 '의료분쟁조정법'의 핵심은 새롭게 설립되는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이 핵심이다. 특수법인 형태로 설립되는 중재원은 ▷의료분쟁의 조정'중재'상담 ▷의료사고 감정 ▷손해배상금 대불 등의 업무를 맡게 된다.

조정절차는 최대 4개월 정도가 걸린다. 일차적으로 90일 이내 결정을 내리도록 하고 있지만 필요할 경우 30일을 연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의료사고 소송이 평균 26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끌었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시간적, 경제적 비용을 줄일 수 있다. 하지만 만약 환자 측이 원하면 중재 없이 바로 소송으로 갈 수도 있으며, 중재안을 어느 한쪽이 거부할 경우에도 의료소송으로 이어진다.

중재원은 효율적인 업무 수행을 위해 산하에 '의료분쟁조정위원회'(이하 조정위)와 '의료사고감정단'(이하 감정단)이라는 두 기구로 크게 나뉜다. 조정위는 조정과 중재, 손해액 산정 등을 맡게 되는데 조정위원의 5분의 2는 판사'검사'변호사로, 5분의 1은 비영리민간단체 추천, 5분의 1은 보건의료인이 아닌 대학 부교수급 이상인 사람으로 임명해야 한다.

사실상 의료사고 조사와 과실 관계 입증 업무를 맡는 감정단은 의료진을 주축으로 구성된다. 감정위원은 전문의 자격 취득 후 2년 이상 경과한 의사나 면허를 취득한 지 6년이 지난 치과의사'한의사, 복지부가 인정한 외국의 자격 또는 면허를 취득한 후 5년 이상 경과한 사람 등이 포함된 감정위원추천위원회에서 위촉한다. 또 분야'대상'지역별로 설치되는 감정부는 의사 2명, 변호사 1명, 검사 1명, 비영리단체 1명 등 총 5명으로 구성돼 의료기관에 대한 조사권한과 참고인에 대한 조사를 진행할 수 있다.

◆절반의 성공, 정작 핵심은 빠져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의료사고 규모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약사법에는 사고 발생 시 신고의무가 규정이 돼 있지만, 의료법에는 이런 조항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병원들은 사고를 쉬쉬할 뿐이다.

의료소비자시민연대 강태언 사무총장은 "우리나라에서 한 해 동안 대략 1만~2만7천 명 정도가 의료사고로 사망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한 해 평균 19만5천 명이 의료사고로 사망하는 미국이나, 4만8천 명 정도가 사망하는 영국의 통계를 토대로 인구 비율로 나눈 수치다.

강 사무총장은 "통계가 없다보니 뭐라고 꼬집어 말하긴 곤란하지만 선진국들의 경우 산재나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자보다 의료사고 사망자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해 산재로 2천500여 명이 사망했으며, 교통사고 사망자는 5천500여 명이었다.

이처럼 피해규모가 상당할 것으로 추정되는 의료사고이지만, 과실여부에 대한 입증 책임이 환자에게 있다보니 사실 의혹이 있어도 쉽게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의료소송은 그 특성상 사고나 과실 여부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병원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라 환자 측에서는 증거자료 수집이 어려운데다, 일반인들은 의무기록을 본다 하더라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전문 분야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벽을 넘지 못해 소송을 포기하는 경우도 상당수다.

이 때문에 시민단체는 "진료 과정에서 과실이 없었음을 의사가 입증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을 끊임없이 펼쳐왔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3년을 씨름했지만 결국은 어느 쪽에도 입증 책임을 명시하지 않은 채 두루뭉술하게 넘어간 것이다. 강태언 사무총장은 "법안이 졸속으로 만들어지는 바람에 사실상 그 의미를 잃었다"며 반발했다. 아무리 독자적인 권한을 가진 기구를 설치한다고 하더라도 실제 진료를 맡은 의료인이 아니고서는 병원 안에서 행해진 진료의 전 과정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과실 유무와 인과관계를 규명하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시각도 있다. 굳이 입증책임을 명시하지 않더라도 대법원 판례에서는 이미 병원 측에다 상당부분의 입증 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병희 변호사는 "2건의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피해자는 진료를 받을 당시까지 별다른 이상을 일으킬 만한 주변 정황이 없었다는 점만을 간접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자료만 제출하면 나머지 진료상의 과실이 없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병원(의사)측에서 입증하도록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현재 대구지방법원의 경우에는 환자나 그 가족들이 의무기록 번역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해 번역본 제출도 가급적 병원 쪽에서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의사부담도 가중

의료사고 피해자가 손해배상금을 받지 못했을 경우 이를 대신 주는 손해배상금 대불제도 중재원에 의해 운영된다. 손해배상금 대불에 필요한 비용은 의료기관이 부담하며 건강보험공단이 요양기관에 지급해야 할 요양급여비의 일부를 중재원에 지급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운전자보험이나 산재보험처럼 책임'종합보험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불제도가 도입은 됐지만 결국 이것은 구상권을 청구해 사고 보상에 대한 책임을 의사 개인이 모두 떠안도록 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강 사무총장은 "결국 의료분쟁조정법의 도입 취지라는 것은 사고 피해자들에게 신속한 피해구제와 함께 의사들에게는 안정적 진료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인데 의사 개인이 모든 보상 책임을 떠안도록 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밝혔다. 의사들도 개인 재력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부담을 더는 한편, 환자들이 안정적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보험 방식이 가장 적합하다는 것.

또 이번 법안에서는 의사의 책임을 묻기 어려운 무과실의료사고에 대해 '불가항력 의료사고 보상'이라는 조항으로 포함돼 정부가 피해금액을 예산범위에서 지원하도록 했다. 특히 의료과실을 따지기 어려운 분만사고로 인한 의료 피해는 의료진의 과오가 입증되지 않더라도 환자들이 일정부분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한 것. 하지만 보상 재원 문제가 논란이다. 정부는 이를 위해 1천억원 정도의 예산을 편성해 놓고 있지만 의료사고 규모로 봐서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벌써부터 터져나오고 있다.

결국 관건은 의료사고감정단이 얼마나 철저한 증거수집을 통해 중립적인 판단을 하는가에 달렸다. 이병희 변호사는 "결국 의료분쟁 조정이라는 것은 의사와 환자 양 측이 동의할만한 원만한 보상 수준을 결정하는 일이 될덴데 워낙 양 측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기 때문에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정제도가 도입된다고 해도 한동안은 소송 건수가 줄어들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하는 이유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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