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원칙 안 지키는 건 못 참아"…시장주의 게임 룰 몸에 밴 때문?

'나는 가수다' 사태로 본 우리사회의 여론 구조

가창력 있다는 평가를 받는 가수들이 출연해 자신의 노래가 아닌 임의대로 선정된 다른 가수의 노래를 부른 뒤 500명의 시민 판정단의 평가를 받아 최저 점수를 받은 가수는 탈락하는 서바이벌 방식을 도입한 오락 프로그램
가창력 있다는 평가를 받는 가수들이 출연해 자신의 노래가 아닌 임의대로 선정된 다른 가수의 노래를 부른 뒤 500명의 시민 판정단의 평가를 받아 최저 점수를 받은 가수는 탈락하는 서바이벌 방식을 도입한 오락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

MBC '우리들의 일밤' 코너 '나는 가수다'가 수많은 논란만 남긴 채 결국 4월 한 달 동안 방송을 중단하기로 했다. 지난달 20일, 7명의 가수 중 탈락자로 선정된 김건모에게 재도전 기회를 주자 성난 여론의 집중포화가 쏟아졌던 것. 급기야 프로그램 담당인 김영희 PD가 사퇴하고, 재도전 기회를 부여받았던 김건모 역시 자진 하차하기로 했다.

하지만 27일 방송이 나간 직후에 여론은 한결 누그러들었다. 뒤늦게 '반응이 너무 지나쳤다'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오랜만에 괜찮은 노래를 들을 수 있는 프로그램 하나가 만들어졌는데 아쉽다는 이야기도 많다.

우리는 왜 예능 프로그램에서 일어난 돌발 상황을 두고 프로그램의 존폐 논란과 함께 담당PD까지 교체되는 상황을 만들었으며, '공정사회론'까지 거론하는 과잉반응을 보였을까? 직업 가수들을 놓고 서바이벌 형식을 통해 탈락시키는 방식에 대해 미리부터 '너무 가혹한 원칙이다'며 말이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룰이 무너진 데 대해 우리는 왜 그토록 분노했을까?

◆불공정사회에 대한 응축된 분노가 폭발

'나는 가수다' 사태에서 문제가 됐던 것은 '판정단'이 배제된 채 출연진과 제작진의 의견만으로 김건모의 재도전이 받아들여졌다는 점이다. 판정단을 통해 마치 자신도 이 프로그램을 평가하는 일원이 된 것처럼 느꼈던 시청자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대중이 배제된 채 결정된 일종의 '담합'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영남대 사회학과 허창덕 교수는 "워낙 변칙·편법이 활개치는 사회 속에서 인내해가며 살아왔는데, 심지어 오락프로그램조차도 원칙을 지키지 않는 사태가 생기는 것을 보고 공공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번 사태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는 다른 사안보다도 컸다. 정치·사회적으로 원칙이 깨지고 부당한 사건이야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에 오르내리지만 이번 사건만큼 폭발성을 가졌던 사례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이에 대해 허 교수는 "방송이라는 특수성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대다수 사람들이 화를 표현하고자 할 때는 내 의견이 통할 것인지 말 것인지 여부와, 해가 될 것인지 등을 가늠한 뒤에야 불만이나 의견을 표출하게 된다. 이번 사안처럼 방송의 경우에는 다수의 의견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은데다, 나에게는 아무런 피해가 돌아오지 않는 사안이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허 교수는 "우리 사회는 원칙이 무너진 지 오래됐지만, 이를 표현할 수도 없는 분위기가 됐다"며 "정치 등의 사안에 대해 사람들이 공분을 쉽게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혹시 내가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인터넷 등의 열린 공간을 봐도 의견 표출이 눈에 띄게 줄었다고 했다.

그는 "이번 기회를 통해 아직 사람들이 공정사회, 원칙을 지키는 사회에 대한 열망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이것이 앞으로 잘 승화돼 사회 모든 불공정에 맞서는 힘의 원천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애초부터 말 안 되는 원칙에 웬 분노?

하지만 계명대 심리학과 손영화 교수는 "가수의 탈락을 번복했다고 해서 이를 공정사회 차원에서 봐야 할 문제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애초에 사람들이 프로그램을 보는 시각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프로그램에서 내려지는 '판정단'의 평가라는 것은 노래를 잘하고 못하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수에 대한 선호도와 최선을 다하는 태도에 대한 평가라는 것이다. '서바이벌'이라는 형식의 재미를 취했지만, 알고 보면 제대로 된 '평가'를 기대하기 힘든 프로그램이라는 지적이다.

손 교수는 "솔직히 정엽이 노래를 못해서 탈락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라고 반문하면서 "이미 20년간 노래 실력을 충분히 검증받은 김건모라는 가수가 탈락한 것은 노래를 못해서가 아니라 그의 진지하지 못한 태도 때문"이라고 했다.

가수 신해철 역시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김건모는 찌질한 것이 아니라 처절한 것"이라고 옹호하면서 "원칙? 대상의 차이를 파악도 인정도 못 하고 원칙을 외치는 것은 정의를 가장한 폭력"이라고 꼬집었다. 애초부터 잘못된 원칙이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는 "서바이벌? 원칙? 강호의 검객들이 일개 검투사가 되어 서로 치고받았으면 '아 저건 여흥이고 난 명예심사위원이구나' 하고 놀면 되지 엄지손가락 내렸는데 저놈이 안 죽는다고 난리를 친다"며 "직업가수 서바이벌 자체가 농담인데…"라고 덧붙였다.

◆김건모가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왜 목매나

사실 김건모가 노래를 한 번 더 부르든 말든, 우리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도 우린 왜 과민하게 반응을 했을까?

경북대 심리학과 김지호 교수는 "평소에도 대중들이 유난히 연예인, 미디어와 관련한 사항에는 공정성 내지는 원리·원칙을 까다롭게 따진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스타에 대해 굉장히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이런 엄격함에 부응해 줄 때는 찬사를 보내다가도 아닐 때는 곧바로 돌아서 매도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극명한 사례로 가수 유승준을 꼽았다. 유승준은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국적을 선택해 2002년 고의적 병역 기피로 입국 금지 처분을 받았으며, 이후 한국 연예계에 돌아오지 못하고 미국에서 활동 중이다.

김 교수는 "아마도 우리가 워낙 개인적인 재미를 잘 못 느끼고 살다 보니 미디어에서 벌어지는 일에 마치 내 일인 것처럼 참견하게 되고 애증이 남다르게 된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실제로는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고, 앞으로도 볼 일 없는 연예인에게 공직자나 법조인에게나 들이댈 법한 강한 수준의 도덕관념을 요구하는 것은 내가 이만큼 시간과 관심을 가지고 당신을 긍정적으로 지켜봤으니 당신 역시 룰을 지키라는 '가상적 사회계약' 같은 것이 시청자들의 뇌리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사람들이 자신과는 상관도 없는 일에 극도의 분노를 드러낸 데 대해 "할리우드영화 식의 '편 가르기'라는 인식의 틀에 익숙해졌기 때문"으로 봤다. 수많은 블록버스터 영화, 휴먼드라마, 최근 유행하고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 등을 거치면서 '능력자 vs 희생양' 만들기 구조에 익숙해지면서 별 고민 없이 흑백을 가르게 됐다는 것. 더구나 이번 사안의 경우 팩트(사실관계)가 화면을 통해 여과 없이 전달되다 보니 더 이상 고민할 필요 없이 공분할 수 있는 충분한 여지를 제공했다는 분석이다.

◆당신의 일이라면 잔인할 수 있는가

여기서 하나 질문을 해 보자. 세상 모든 원칙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루저(패자)는 꼭 무 잘라내듯 버려야 하는 존재인가."

이 이야기를 지금껏 논의를 전개해 온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노동시장에 대입을 해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계명대 심리학과 임운택 교수는 "실적이 저조해 해고를 당해야 하는 가장에게 한 번 더 만회할 기회를 준다면 그것은 나쁜 것인가"라고 질문을 던졌다. 또 "네티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진정 '공정한 사회'라면 오히려 '두 번째 기회'를 주는 것이 맞다"며 "한 번 기회를 주고 안 되면 탈락이라는 것은 시장에서 퇴출된 것을 왜 살려주느냐는 기업 논리이지 사람 살아가는 세상의 공정성은 아니다"고 꼬집었다.

그는 일개 방송 프로그램에 우리 사회가 이처럼 격한 반응을 보인 데 대해 "우리 사회가 시장주의라는 게임의 룰에 너무 익숙해진 탓"이라고 풀이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경쟁'을 논하는 사회에 살다 보니 강자만이 살아남고 패자는 잊혀지는 승자독식주의 내지는 적자생존의 룰에 너무 세뇌돼 버린 것이다. 그렇다 보니 경쟁의 룰이 깨지는 것, 더군다나 상당한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김건모라는 가수에 의해 깨지는 것에 대해 더욱 예민하게 반응을 보인다는 지적이다. 임 교수는 "내 문제라고 생각하면 절대 그렇게 독하게 반응하지 못하겠지만, 오락프로그램이라는 것은 나와 동떨어진 한번 걸러진 매개를 통한 것이다 보니 좀 더 무지막지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 같다"고 풀이했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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