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돈(徐相敦 또는 徐相燉'1851~1913)은 조선 말기의 기업인이자 관료였고 민족 독립운동가였다. 대구에서 지물 행상과 포목상으로 성공한 인물로, 정부의 검세관이 되어 조세곡을 관리하기도 하였다. 1907년 정부가 일본에 빚을 많이 져 국권을 상실한다고 생각하여 대구 광문사 사장인 김광제와 함께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대구시는 계산동 이상화 고택 옆에 있었던 서상돈의 생가를 복원하였고 국채보상공원을 조성하고 동상을 세우는 등 그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서상돈은 1886년 벌써 대구의 갑부 반열에 올랐고 1903년 경상도 시찰관이 되었다. 시찰관은 정부의 검세관으로 세금을 미리 대납하고 나중에 세금을 거두어 대납금을 전부 충당하는 일종의 세금징수 청부업이라 할 수 있는데, 세금을 대납할 수 있는 재력을 가지고 있어야 될 수 있었다. 시찰관은 마음만 먹으면 큰돈을 벌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에 서로 하려고 줄을 대고 운동을 하기도 했다. 서상돈은 다른 시찰관과는 달리 세금을 거두어 대납한 금액을 초과하는 부분도 나라에 바쳤다. 세금을 거둘 수 있는 자격은 오직 나라만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907년 1월 28일 오후 3시, 서상돈은 대구 북성로 광문사(현재 수창초등학교 정문 옆)로 갔다. 사장실로 들어서자 김광제 사장이 담배를 피우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상돈 부사장이 열다섯 해나 손위였으나 젊은 김광제 사장에게 깍듯이 상사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김광제도 서상돈을 부하직원으로 여기지 않고 손위 선배로 극진히 예우했다. 김광제는 다음 날 있을 특별회의의 안건에 대해서 서상돈의 의견을 구했다.
"광문사라는 이름이 조금 상업적인 것 같아서 목적을 나타내는 수식어를 앞에 붙여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 선생님들의 의견을 들어보고자 내일 특별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선진 학문과 근대 사상을 전파하고 자주자강 의식을 고취하여 우리 민족을 계몽해 보자는 취지로 설립한 우리 광문사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출판인쇄사로 보이는 것 같아 유가에서 추구하는 이상사회를 일컫고 온 세상이 번영하고 화평한 상태를 의미하는 대동(大同)이라는 말을 붙여 대동광문사(大同廣文社)로 개칭하자는 것이 제 소견입니다. 그에 대한 선생님의 고견을 미리 들어보고자 오늘 이렇게 뵙기를 청했습니다."
서상돈은 눈을 감고 수염을 쓸어내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김광제의 말이 끝나자 눈을 떴다.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만사에 이름이 중요한데 광문사보다는 대동광문사가 훌륭해 보입니다. 광문사 하면 단순히 출판사만 연상되는데 대동광문사 하니 사장님의 큰 뜻이 보입니다. 훌륭한 생각입니다. 저는 사장님 의견에 찬동합니다."
서상돈은 말이 부사장이지 대구의 경제계를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재력과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간부로 활약했던 경륜과 애국심으로 대구의 여론을 선도하고 있었고 광문사에 제일 많은 금액을 투자한 실질적인 사주였기 때문에 김광제 사장도 광문사의 중요한 결정에 대해서 그의 내락을 받아야 했다. 그런 절대적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서상돈은 광문사의 경영에 일절 관여하지 않고 김광제 사장에게 전부 일임하였다. 그만큼 김광제에 대한 서상돈의 신임은 절대적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에 대한 비분강개로 동래경무관을 사직하고 올린 김광제의 상소문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그에 대한 신뢰와 존경심으로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서상돈의 흔쾌한 동의에 김광제는 조금 상기되어 가슴에 품고 있던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었다.
"선생님이 계셔서 한결 마음이 든든합니다. 하지만 시국이 워낙 어수선하여 그래도 힘에 부칩니다. 일본이 우리 조정에 억지로 차관을 들여오고 국채를 발행하게 하여 그 돈으로 일본인 거류민들을 지원하고 우리 민족을 탄압할 조직을 키우는 데 쓰고 있으니, 참말 큰일입니다. 나라 빚이 벌써 1천300만원이라는데 매년 재정적자가 77만원이라 하니 언제 나라 빚을 다 갚겠습니까? 나라든 개인이든 빚이 많으면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벌써 외교권이 뺏긴 마당에 빚까지 갚지 못하면 나라를 빼앗기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참 답답한 일입니다. 탐관오리와 부패한 조정을 보면 부아가 치솟지만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면 앞이 캄캄합니다. 광문사의 계몽활동이 마치 당랑거철(螳螂拒轍)이 아닌가 여겨져 힘이 빠집니다."
서상돈은 어수선한 시국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하고 있었으나 워낙 국제정세와 국내사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정확한 진단조차 못 하고 있던 터였다. 그 와중에 들은 김광제의 말은 그에게 명료한 상황 판단과 전광석화와 같은 해결책을 던져주었다.
"사장님, 십시일반이라 하지 않습니까. 우리 이천만 국민이 똘똘 뭉치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봐요. 우리 이천만 국민이 한 달에 이십전씩 세 달만 모으면 되지 않겠어요. 조금 모자라는 돈은 형편이 좋은 사람들이 더 보태면 될 겁니다. 이십전이면 담배 피우는 사람 한 달 담뱃값 정도인데 단연(斷煙)하면 간단히 해결되는 거 아닙니까? 건강에 나쁜 담배도 끊고 나라 빚도 갚고 이건 진짜 일거양득입니다. 담배 안 피우는 사람은 금주하면 되고, 아낙네는 반찬을 아끼고 불요불급한 패물을 모아도 될 것 같습니다."
서상돈의 이야기를 듣던 김광제는 눈을 크게 뜨더니 탁자를 치며 벌떡 일어나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선생님!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요? 내일 당장 선생님이 정식으로 발의해 주십시오. 저는 적극 찬성합니다.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등 애국 언론과 힘을 합하여 국민운동으로 전개해 봅시다. 선생님이 깃대를 잡아주십시오. 제가 취지문을 쓰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저도 좋습니다. 제가 먼저 술과 담배를 끊고 의연금 천원을 내겠습니다. 별도 조직을 만들어 빨리 진행하도록 합시다. 부인회와도 접촉하여 도움을 받아야 되겠지요?"
"역시 선생님답습니다. 저도 술과 담배를 끊겠습니다. 부인회는 제가 알아서 협조를 이끌어내도록 손을 쓰겠습니다. 술, 담배 안 하겠다는 데 반대할 부인네가 있겠습니까? 패물도 생활필수품이 아니기 때문에 잘 설득한다면 의외로 호응도가 클 수 있을 겁니다."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아이디어가 일사천리로 구체화되자 두 사람은 마치 연인들처럼 얼싸안고 기뻐했다.
이렇게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만세보 등 애국 언론이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뜻 있는 애국지사들도 너도 나도 앞장서는 바람에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갔다. 서상돈은 솔선수범 거금 천원을 의연하고 큰시장(서문시장)에서 몸소 모금운동을 하기도 하였다. 남부러울 것 없는 삼만 석의 갑부가 연단에서 금주, 단연으로 나라 빚을 갚자고 호소하며 바닥에 엎드려 큰절까지 올렸다. 이에 감동한 소를 잡는 업을 하던 김시복이란 사람이 거금 10원을 냈고 시장 상인과 장 보러온 사람들도 앞을 다투어 모금함으로 몰려들었다.
국채보상운동이 한창 진행되던 어느 날, 서상돈의 사무실로 묘령의 아가씨가 찾아왔다.
"선생님, 저는 천한 기생입니다만 선생님의 높은 뜻을 흠모하여 국채보상운동에 동참하고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부디 뜻을 저버리지 말아주십시오."
그녀는 가지고 온 보따리를 풀면서 얼굴을 붉혔다.
"저희들도 나라 빚을 갚는 데 도움이 되고자, 부인은 아니지만 부인회를 만들어 가락지, 귀고리, 비녀, 은장도 따위를 모아 갖고 왔습니다.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도움이 되고 말고요. 금주운동으로 어려움이 많을 텐데, 이렇게 패물까지 모아오시다니 이 고마움을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기생들이 모은 패물을 받자니 조금 애처로운 생각이 들어 차마 받지 못 하고 머뭇거리자 그녀는 살짝 삐친 듯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보답이라니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오히려 섭섭합니다. 저희는 이 나라 백성이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천하게 살아도 나라 걱정은 마찬가지랍니다."
"그 뜻은 잘 알겠지만 너무 귀한 것들이라 큰 부담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사는 데 꼭 필요로 하지 않는 것들이고, 없어도 큰 불편이 없는 것들이오니 큰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나라 빚을 다 갚고 좋은 세월이 오면 큰 보람으로 알겠습니다."
"고마운 일이요. 정말 큰일을 했습니다. 소저 같은 사람들이 있는 한, 우리 민족은 영원히 무궁할 겁니다."
서상돈은 그녀의 패물 보따리를 받아 금고에 넣고 다시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그녀는 나갈 생각을 않고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자세히 보니 갸름한 얼굴에 눈이 크고 코도 오뚝한 미녀였다. 볼이 발갛게 상기된 채 눈을 내리깔고 손등을 살며시 비비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서상돈은 마음이 변했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금고에서 패물을 다시 꺼내와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저한테 이 패물을 받았다간 평생 후회할 것 같네요. 마음만 받고 이건 돌려 드릴 테니 갖고 가셔서 주인들에게 돌려 드리세요. 그 대신 내가 그만큼 의연금을 더 보탤게요. 다 낸 걸로 생각하세요. 약속합니다."
"선생님! 그러시면 안 되지요. 저희들 정성을 그런 식으로 무시하면 기분 나쁘답니다."
그녀는 또박또박 힘주어 말하며 패물 보따리를 단호하게 물리쳤다. 서상돈은 물끄러미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할 수 없이 다시 패물 보따리를 금고에 넣었다. 그래도 그녀는 갈 생각을 않고 다소곳이 앉아만 있었다.
"혹시 다른 볼일이 더 있습니까, 뭐든지 말씀해 보십시오.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돕겠습니다."
서상돈이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저… 이런 말씀 드리기 부끄럽습니다만 소녀가 선생님을 흠모해 왔습니다. 한 번만이라도 모실 기회를 주신다면 큰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그녀는 그 말을 하곤 온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그녀의 말에 서상돈은 번개를 맞은 사람처럼 한동안 정신이 멍했다.
"아… 소저의 깊은 뜻은 잘 알겠으나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지요. 조금 한가해지면 내가 한번 찾아가리다. 지금은 큰일을 수행 중이라 너무 바쁘고 의연금을 관리하는 처지라 오해의 소지도 있습니다."
서상돈이 오른손을 살짝 들며 일어서자 그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서상돈은 못 본 척 그녀를 밖으로 배웅하고 돌아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후 서상돈은 그녀를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대구의 모든 요정을 다 돌아보았지만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이름도 모르는 그녀를 찾는다는 건 서울 가서 김 서방 찾는 꼴이었다. 잠시 만나 옷깃도 스치지 않은 인연이었지만 세월이 갈수록 치유할 수 없는 마음의 큰 상처로 남았다.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교활한 방해공작으로 곧 어려움에 직면했다. 송병준 등이 지휘하던 매국단체인 일진회가 국채보상운동을 수행하던 단체를 공격하였고 통감부에서도 국채보상기성회의 간사인 양기탁을 보상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결국 중단되었고, 1909년과 1910년 국채보상금처리회가 조직되어 모금된 기금을 교육 사업으로 전환할 것을 논의하기도 하였으나,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이후, 보상금은 일제의 경무총감부에 모두 빼앗겼다.
비록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끈질긴 방해공작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우리 민족과 우리 대구인의 저력을 만방에 보여준 역사에 길이 빛날 일대 사건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은 1997년 IMF 환란 시기에 '금모으기운동'으로 재현되어 세계인을 한 번 더 놀라게 하였다.
오철환 소설가·대구광역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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