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학기 학부모는 괴롭고 교사도 냉가슴 왜?

초등학교 6학년 자녀를 둔 주부 A(41) 씨는 새 학기 고민이 늘었다. 아이 성적 챙기는 것도 여간 신경쓰이는 일이 아닌데 학교 측에서 "학생들이 이번에 수학여행을 가는데 학부모회에서 알아서 챙겨주시면 좋겠다"며 넌지시 '성의'를 요구하는 바람에 머리가 더 아프다. 학부모회 회장직을 맡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직접 이런 말을 듣고 보니 이만저만 부담이 아니다.

"액수도, 명목도 말씀 않고 수학여행 비용 운운하며 일정 부분을 학부모가 부담해야 하는 형편이라더군요. 찬조금을 걷는 게 불법 아니냐고 물었더니 교장 선생님은 발전기금 형식을 취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네요. 세상이 변하고 학교도 변했다는데 제가 학교 다닐 때와 뭐가 달라진 거죠?"

매년 새학기만 되면 학부모들은 비슷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학교 선생님을 만나 인사도 하고, 학교에 관심 있는 부모라는 인상을 받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다. 특히 '선물' 같은 문제로 이어지면 고민은 더 깊어진다. 학부모회와의 관계도 걱정이다.

교사들도 새 학기 스트레스가 만만찮다. 새로 만난 아이들 살피랴, 쏟아지는 공문 처리하랴 정신이 없는데 이것저것 들고 찾아오는 학부모가 부담스럽다고 하소연이다.

◆학부모라는 짐, 새 학기면 더 무거워

"하지 말라는 건, 진짜 아무것도 내밀지 말라는 게 아니잖아요."

초교 1학년 딸을 둔 초보 학부모 B씨는 학교 찾아갈 일이 부담스럽다. 아이의 담임교사와 안면은 터야 하는데 무엇을, 얼마나 가져가야 할지 고민이라고 했다. 빈손으로 가기는 그렇고 선물을 준비할까, 아니면 차라리 '봉투'가 나을까 고르기가 쉽지 않다. 학교에선 무엇이든 절대로 가져오지 말라고 하는데 주변 학부모들의 말을 들어보면 의심을 떨치기 어렵다.

"어떤 학부모는 수십만원짜리 상품권을 가져갔다, 선생님들 회식 자리를 책임졌다는 말이 들리면 불안하죠. 괜히 나만 올곧은 척하다 안 좋은 인상이나 주지 않을지 두려워요."

새학기만 되면 회장 선거부터 학부모회 가입, 촌지 등 통과의례처럼 이어지는 고민들 때문에 학부모들의 시름이 깊어진다. 신학기만 되면 학부모들 사이에 떠도는 여러 '카더라 통신'은 불안감을 부채질한다. 하지만 마냥 외면하기도 싶지 않다. 실제 전국참교육학부모회가 지난해 3, 4월 접수한 학부모 상담 내용을 보면 전체 상담사례 168건 중 자녀 인성이나 진로문제는 4건이지만, 불법 찬조금에 대한 고민 상담은 32건이나 됐다.

중학생 자녀를 둔 D씨의 마음도 무겁다. 아이가 '눈치도 없이' 학생회장 자리를 맡는 바람에 부담이 커졌다는 것이다. 이른바 '자릿값'이 D씨의 고민거리다. "학교 측에 얘기하니까 모르는 일이라고 하는데, 학부모들끼리 알아서 할 일이라는 답이 돌아왔어요. 교사 회식비, 선물비 등에 쓰이는 돈인 줄 알면서도 모른 체하니 속이 상하죠. 게다가 학부모회 임원 등 다른 학부모들이 눈치를 자꾸 주니 난감할 따름입니다."

중학교 3년생 딸을 둔 C씨는 한 교사가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한 자기 반 아이를 당선시키기 위해 반 학생들에게 투표를 강요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후보는 학부모회장의 자녀이기 때문에 학교 측에서 감싸고 도는 거겠죠. 학교 측이 촌지를 받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학교에선 "해당 학생이 선거활동을 할 수 있도록 청소를 빼주는 정도였다. 표를 찍어주라고 한 적 없다"고 해명하기에 나섰다.

맞벌이 부부인 E씨는 학부모 모임 참가 요청을 받은 뒤 속이 탄다. 학교 측은 학부모회가 아니더라도 청소, 급식 봉사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학부모를 참여하게 하는데 시간을 빼기가 빠듯하다. 지난해 대신 봉사 활동에 나섰던 시어머니가 몸이 불편해 올해는 일부 어머니들처럼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해야 할 판이라고 했다. "학부모회 가입 권유를 받은 뒤론 잠이 잘 안 옵니다. 봉사활동이야 사람을 사서 해결한다 해도 학부모회는 누가 대신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요청을 거절하자니 내 아이가 선생님 눈 밖에 나게 될까 초조하죠."

◆학부모의 '치맛바람', 교사도 괴롭다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는 A교사는 일부 극성 학부모들 때문에 신학기만 되면 힘겹다. 봉투를 내밀거나 선물을 안기려는 학부모를 등 떠밀어 돌려보내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아이에게 불이익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던져놓고 가는 분들이 있어 난감합니다. 특히 학부모회 임원들 중에 그런 분들이 있어요. 억지로 되돌려드렸더니 오히려 기분 나빠하더군요."

신학기만 되면 교사들도 학부모와의 관계 때문에 속이 썩는다. 아예 학부모들이 찾아오지 않으면 좋겠다는 하소연까지 나온다.

특히 최근 학부모회가 다시 활성화되면서 고민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학부모회는 2010년 교육과학기술부가 교육의 질과 책무성 강화를 목표로 예산 100억원을 들여 '학부모 학교 참여 지원사업'을 시작하면서 다시 활성화되고 있다. 해방 이후 사친회, 기성회, 육성회 등으로 이어지면서 '치맛바람'의 폐단으로 지목돼 유명무실화되는가 했더니 다시 기지개를 켠 것이다. 이에 따라 학부모회를 통한 찬조금 걷기가 새로 고개를 쳐들고 있는 형국이다.

B교사는 새 학기를 맞아 학부모들과 마주하는 것이 버겁다고 호소했다. "일부 선생님들이 '성의' 정도로 선물이나 봉투를 받는 경우가 있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도매금으로 모든 교사들이 그럴 것이라고 오해받고 싶진 않습니다. 촌지를 못 받겠다며 학부모와 실랑이를 벌일 때면 '내가 왜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라는 자괴감에 빠져요."

C교사도 학부모와 만나는 일이 스트레스다. 편하게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지만 막상 마주 앉으면 무엇인가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특히 학부모가 금품을 내미는 순간의 어색함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봉투를 내미는 학부모에게 '학기가 끝난 뒤 정말 고맙다고 느끼셨을 때 주시면 된다'며 달랜 적도 있어요. 한편으로는 '얼마나 교사를 못 믿으면 저러실까'라는 생각에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학부모, 교사 간 신뢰 구축이 먼저

대구시교육청은 3, 4월 학부모의 출입이 잦은 점을 감안해 촌지와 불법 찬조금이 오가는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지난달 초 각급 학교에 촌지와 불법 찬조금 근절을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이라는 서한문까지 발송했다. 가정통신문을 통해 학부모에게도 그 같은 내용을 알리도록 조치했다.

시교육청 관계자는 "학부모회 운영을 위해 필요한 예산은 시교육청에서 최대한 지원하고 있는데 별도의 찬조금을 걷는 행위는 교육계를 망치는 일"이라며 "각급 학교 학부모회 편성이 끝나는 대로 명단을 확보해 수시로 연락을 취하는 등 모니터링 활동을 강화할 것"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학교에서 노골적으로 금품을 요구하는 경우가 줄긴 했으나 이 같은 부조리를 뿌리뽑기 위해서는 교사와 학부모 사이에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먼저라고 지적한다. 학부모회가 아니더라도 학부모들이 얼마든지 학교 활동에 참가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고, 학교에서도 오히려 이런 학부모들의 진지한 관심을 더욱 반가워한다는 것.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대구지부 조정아 정책실장은 "교사와 학부모 간 신뢰가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정부가 학부모회 조직을 주도하니 잡음이 이는 것"이라며 "촌지 때문에 학부모의 학교 출입을 막다 보면 서로 소통의 문제가 생기고 이를 다시 촌지로 해결하려는 악순환을 낳고 있다"고 말했다.

참교육학부모회 대구지부 문혜선 상담실장은 "개인 간 촌지 수수 행위는 많이 줄었으나 학부모회 찬조금과 같은 잘못된 관행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며 "찬조금 수수에 대해 교장에게 관리 책임을 엄격히 묻는 등 깨끗한 교단 조성을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전국참교육학부모회 학부모 상담 통계(2010년 3,4월)

자녀인성문제 /이성문제, 흡연, 인터넷 중독, 학교 부적응 등/ 3건

자녀 진로문제 /2건

교사문제/촌지, 체벌, 자질 등/41건

학교문제/불법 찬조금, 학교 비리, 학교운영위원회, 급식 등/96건

기타 문의/1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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