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가는
추풍령 굽이마다 한 많은 사연.
흘러간 그 세월을 뒤돌아보며
주름진 그 얼굴에 이슬이 맺혀
그 모습 그립구나! 추풍령고개. (전범성 작사'백영호 작곡)
추풍령(秋風嶺). 충북 영동군과 경북 김천시를 사이에 둔 고개다. 추풍령은 대중가요에 등장할 만큼 국민들에게 친숙하다. 그러나 숱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추풍령이 불과 높이 221m의 낮은 고개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적다. 노랫말처럼 구름이 자거나 바람이 쉬기에는 너무 낮다. 하지만 추풍령을 모두가 기억하는 것은 부산에서 서울을 잇는 교통로로서의 역사적 가치와 상징성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 교통 대동맥
추풍령은 문경 조령, 단양 죽령과 함께 일찍이 중요한 교통로로서 주목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의 북진을 막기 위한 혈전의 현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1905년 경부선 철도가 추풍령을 통과하면서 조령, 죽령 등으로 삼분됐던 교통의 중심이 추풍령으로 급속히 집중되는 계기가 됐다. 지금은 국도 4호선과 경부선 철도,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고 최근 KTX까지 들어서 우리나라 대부분의 육상 물류가 관통하는 교통 대동맥으로 자리 잡았다.
요즘 대지가 초록빛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다. 길이 생기고 수많은 인마(人馬)로 붐볐을 옛 김천(도)역~추풍령에 이르는 옛길 30리를 봄날에 찾았다. 마을과 마을,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던 정든 길은 대부분 옛 모습이 사라졌지만 길과 마을, 얘기는 쉼없이 이어져 정겹게 길손을 맞아주고 있었다.
첫 발걸음은 김천 남산동 김천초등학교로 향했다. 이곳은 김천(도)역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역마의 자취는 흔적도 없고 운동장 한쪽에 오늘날 역장인 찰방(察訪)의 선정비 4기만 말 없이 자리를 지켜 옛 경상도 최대의 역이 이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다.
역 자취를 뒤로하고 본격적으로 추풍령길로 접어들었다. 가파른 길을 따라가니 고성산 자락인 노실고개를 만난다. 지금은 일부만 옛 정취가 남아 있다. 경부선 철도가 평화동을 지나면서 신작로가 역 앞으로 생겨 골목길로 전락한 덕에 요행히 아직 고갯길의 정취를 머금고 있다. 인근에는 무수한 길손들이 목을 축였을 김천을 대표하는 샘인 금지천(金之泉)이 있다. 우물 앞에 문을 달고 우물은 철판으로 옷이 입혀져 있어 보기에 좋지 않다. 우물을 사용하지 않아 수도꼭지가 메말라 있어 물맛을 볼 수 없는 아쉬움이 크다. 이 샘물로 술을 빚은 것이 김천의 대표적 민속주인 과하주(過夏酒)다. 우물 뒤 옹벽에 새겨진 '금릉주천'(金陵酒泉)이란 글씨가 눈에 띈다. 이 샘으로부터 김천이라는 지명이 탄생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노실고개는 풍수적으로 늙은 쥐가 밭으로 내려온다는 노서하전형(老鼠下田形)의 명당으로 유명하다. 김천시내를 감싸고 있는 고성산이 늙은 쥐의 형국인지라 노서고개라고 한 것이 변해 노실고개라 불린다. 이곳에는 명당지세를 훼손하기 위해 일제가 끊었다는 남산공원 뒷길이 아픈 생채기처럼 남아 있다.
노실고개를 지나면 지금의 부곡동 원골마을이 나온다. 관리들의 숙소인 남원(南院)이 있어 형성된 마을이다. 원골은 구한말 파리장서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 선생이 은거하면서 서당을 열어 후학을 양성한 곳으로 유명하다. 후손들이 원계서원을 세워 선생의 유업을 기리고 있다.
고성산 자락을 따라가던 길은 갑자기 방향을 틀어 직지천을 넘어 김산(金山)군 관아가 있던 교동(구읍마을)으로 이어진다. 연못에 핀 연꽃이 아름다워 붙여진 '연화지'엔 지금은 연은 모두 뽑혀지고 연못 주변에 벚꽃이 대신하고 있다. 김천에서 가장 경치가 아름다운 곳 중 하나로 가족'연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옛 관아는 지금 자취를 찾을 수 없다. 대신 최근 택지를 조성하면서 웅장했던 옛 관아의 위용이 드러났는데 당시 발굴된 많은 유물 등은 타임캡슐처럼 땅에 묻혀 훗날을 기약하고 있다.
◆김천은 문화의 산실
도심을 벗어나 추풍령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길은 어김없이 마을로 향하고 배천마을에 닿는다. 영남 사림을 이끌었던 점필재 김종직이 말년에 낙향, 후학을 양성했던 마을이다. 김천은 조선 초 고려 멸망을 애통해 하며 많은 명현거유들이 낙향해 후학 양성을 통해 문풍(文風)이 높아졌는데 점필재의 합류는 김천이 전국적인 문화의 산실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된다. 이로 인해 통상 30리마다 설치되었던 역을 8리에 불과한 이 마을에 '문산역'이라는 간이역을 설치했다니 그 위상을 쉽게 알 수 있다.
글 읽는 소리로 낭랑했을 배천마을을 지나자 주변 풍경이 확연히 달라진다. 길 가 보리밭은 한껏 초록을 뽐내고 이름 모를 새소리가 정겹다. 봄바람은 더욱 귓가를 간지럽힌다. 옛날에는 흙먼지 날리는 길이었겠지만 지금은 아스팔트로 잘 포장돼 있다. 한참을 가니 봉계마을이 나타난다. 두보의 시를 최초 언해하고 유배가사의 효시인 만분가(萬憤歌)를 집필한 매계(梅溪) 조위(曺偉)를 배출한 곳이다. 창녕 조(曺)씨와 영일 정(鄭)씨의 집성촌으로 김천에서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한 마을의 하나로 꼽힌다.
주막이라도 있으면 목을 축이고 싶은 심정이지만 서둘러 길을 나섰다. 추풍령 옛길이 경부고속도로와 나란히 경주하듯 이어진다. 눈을 들어 보니 언뜻 보기에도 산이 뚝 잘린 듯한 얕은 고갯길이 나오는데 바로 유명한 낙고개다. 원래 즐거울 낙(樂)자를 써서 낙고개(樂峴)라 했는데 명당으로 소문이 나 고개를 넘으면 만사형통하고 즐거운 일이 생긴다는 곳이다. 옛날 과거 응시생들이 와서 넘어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이 고개가 명당임을 간파하고 맥을 끊었다는 소문이 나면서 기피하는 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고개 이름도 떨어질 낙(落)자를 써서 낙고개(落峴)가 되었다는 다소 억울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낙고개 너머에는 봉산면 태화리 평촌(平村)마을이 있다. '떡전골 주막'이라는 구한말까지 유명한 주막이 있던 곳이다. 이 주막은 서울'부산 중간쯤에 자리 잡았기 때문에 길손들이 꼭 한번은 들르는 곳이다. 서울에서도 떡전골주막에서 만나자고 하면 서로 통했을 정도였다. 여기서 추풍령과 괘방령으로 길이 나누어진다. 평촌마을은 추풍령'괘방령 일대에 산적이 많아 고개를 넘어 이 마을까지 오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구성진 판소리와 기녀들의 웃음소리 등 수많은 사연을 간직했을 주막은 지금은 포도밭으로 변해 상전벽해를 실감케 한다.
주막을 지나면 완만한 오르막길 바야흐로 추풍령 고개로 접어든다. 새로 시원하게 뚫린 국도 4호선 아래를 지나 예전 길을 더듬으면 고도암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 입구에는 남정(嵐亭) 김시창(金始昌)을 기리는 정려각이 기품있게 서 있다. 성종'중종'인종 3대 임금의 붕어(崩御) 때마다 3년 상(喪)을 치르고 많은 제자를 길러내 벼슬을 여러 차례 제수했으나 평생 관직을 마다한 올곧은 선비 이야기가 옷깃을 여미게 한다. 마을 입구는 유일하게 옛길의 풍광을 잘 간직하고 있는데 수백 년은 족히 됨직한 버드나무가 길손에게 예를 갖추듯 길가에 줄지어 늘어서 있다.
◆선인들의 소박한 마음 전해져
고도암을 거친 길은 가성마을과 감나무가 많아 이름 붙여진 시목을 거쳐 죽막마을에 이른다. 죽막은 임진왜란 때 김천 전투에서 패한 관군이 추풍령으로 후퇴한 후 3일간 왜군과 혈전을 벌인 추풍령 전투의 지휘소가 있던 곳이다. 조선 명장 정기룡(鄭起龍) 장군이 수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인근 마을의 소를 징발해 밤에 소꼬리에 기름을 먹여 불을 붙이고 이를 적 진영에 밀어 넣는 전략으로 적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는 전승담이 전한다.
이 마을 뒤 다락골에는 경부고속도 추풍령휴게소가 자리한다. 다락골은 마을을 지나던 한 스님이 이 골짜기를 가리켜 먼훗날 이름난 놀이터가 될 자리라고 말해 다락골(多樂谷)이라고 불렸는데 신통하게도 수백 년이 지나 마을 뒤로 고속도로가 생기고 그곳에 밤낮으로 사람들이 넘쳐나는 휴게소가 들어섰으니 스님의 예언이 맞았다고 할까.
이 마을에서 추풍령 고갯마루까지는 당마루 또는 당령(唐嶺)이라고 불린다. 삼국통일전쟁 당시 당나라 군사들이 이곳에 진을 치고 주둔했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당마루를 거슬러 오르면 영동군 추풍령면과 경계를 이루는 추풍령 정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개마루에는 '추풍령'(秋風嶺)이라는 표석이 있다. 한동안 과거응시생들이 이 고개가 추풍낙엽(秋風落葉)이 연상된다 하여 풍성할 풍(豊)자로 바꾸어 '秋豊嶺'으로 쓴 시절도 있었으나 용케 제 이름을 찾은 것이다. 이름으로 인해 많은 과거응시생들은 낮고 평탄한 추풍령길을 마다하고 가파른 인근의 궤방령으로 우회하는 수고로움을 감당했다. 괘방령은 과거합격을 알리는 방문(榜文)에 자신의 이름이 걸린다(掛'걸 괘)는 의미로 해석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시험에 임하는 수험생들의 마음가짐은 큰 차이가 없는 모양이다. 옛길을 걸으면 선인들의 꾸밈없는 소박한 마음이 다가오는 듯하다.
김천·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12년 간 가능했던 언어치료사 시험 불가 대법 판결…사이버대 학생들 어떡하나
[속보] 윤 대통령 "모든 게 제 불찰, 진심 어린 사과"
한동훈 "이재명 혐의 잡스럽지만, 영향 크다…생중계해야"
홍준표 "TK 행정통합 주민투표 요구…방해에 불과"
안동시민들 절박한 외침 "지역이 사라진다! 역사속으로 없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