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이맘때면 학부모들은 아이의 영어 교육을 놓고 고민에 휩싸인다. 신학기에 맞춰 여러 영어학원을 비교하면서 학원 시간표 짜기에 바빠진다. 학생들은 보다 잘 가르친다는 학원을 찾아 전전하는 '영어 학원 유목민'이 된다. '외국어는 일찍 배울수록 유리하다'는 속설에 자녀가 우리말을 제대로 구사하기도 전 영어를 가르치는 데 매달리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정부가 내놓는 방침은 사교육을 더욱 부채질한다. 교육과학기술부가 '국가영어능력평가시험'(NEAT)을 개발, 2013년 대입 수시모집 전형부터 대학들의 참고자료로 활용토록 하겠다고 밝히자 학원가에선 관련 강좌가 속속 개설되는 형국이다.
이 때문에 고가의 영어 학원, 영어교재도 마다하지 않지만, 학부모들의 불안감은 여전하고 아이들은 영어 스트레스에 시달린다.사교육에 흔들리지 않고 효과적으로 자녀에게 영어를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영어에 울고 웃다
"이미 늦은 거 아닐까 불안해서 잠이 안 올 지경이에요." 7살 아이를 둔 이모(36'여) 씨는 주위 얘기를 듣다 보면 조바심이 난다고 했다. 유치원에서 간단한 놀이식 영어를 맛본 것이 전부여서 다른 아이들보다 한 발 뒤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영어유치원에서 원어민과 지내며 집중 교육을 받은 옆집 아이는 영어가 입에서 줄줄 나와요. 게다가 곧 미국의 친척에게 가 1, 2년을 보낼 거라더군요. 하지만 우리애는 또래가 보는 영어 동화책도 잘 못 읽어요."
반면 초교 1년생과 유치원생 아이 둘을 둔 서모(46) 씨는 담당 교사들이 아이의 영어 실력을 칭찬할 때면 뿌듯해진다. 4, 5살 때부터 영어 학원 유치부에 보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 하나에 매달 60만~70만원이 들었지만 결과에 만족한다고 했다. "다들 영어는 일찍 배울수록 잘할 수 있다잖아요. 혼자서도 영어 동화책을 소리 내 곧잘 읽을 뿐 아니라 간단한 문장을 술술 말하는 걸 보면 효과는 확실한 거죠. 외국인을 만나도 'Good morning! Nice to meet you! What's your name?' 이라고 먼저 물어요."
학부모들은 아이 영어 실력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다. 아이가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게 하려면 어떤 프로그램이 학원가에서 유행하는지, 이웃집 아이는 어떻게 영어를 배우는지 귀를 쫑긋 세울 수밖에 없다. 자녀의 나이가 어릴수록 더하다. 공교육에선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영어를 가르치지만, 부모들은 적잖은 비용을 감수하고 아이들을 일찌감치 영어 사교육 현장으로 내몬다.
교육열이 높기로 이름난 대구 수성구의 한 초등학교는 영어 조기 교육에 매달리는 학부모들의 실상을 엿볼 수 있다. 1년 이상 외국 유학을 다녀와 원어민 교사와 자연스레 대화를 할 수 있는 아이들이 한 반에만 6, 7명은 된다. 이 학교 한 학부모는 "유학을 다녀온 아이들끼리도 '미국파', '영국파'는 자랑스레 얘기하고, '필리핀파'는 무시할 정도니 어떻게 영어 조기 교육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했다.
영어 실력이 천차만별인 학생들을 한 교실이 모아두다 보니 교사 또한 어느 수준에 맞춰 수업을 해야 할지가 고민거리다. 이 때문에 대구의 모 초등학교에선 매일 오전 정규 수업 시간 전과 방과후 시간을 활용해 진단평가에서 상대적으로 점수가 낮은 학생들을 따로 모아 가르치고 있다. 이곳 관계자는 "영어 실력이 처지는 학생들을 영어 담당 교사와 원어민 교사가 별도로 집중지도하지 않으면 정규수업 과정을 따라붙지 못할 뿐 아니라 학부모의 불만도 커지게 된다"고 전했다.
소위 '잘나간다'는 영어 학원에 들어가기 위해 다시 사교육이 동원되고 있다. 학원에 들어가기 위해 학원 과외를 받는 식이다. 수성구 한 영어학원은 강사 전원이 원어민으로 구성돼 전담 수업을 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초교 3년생부터 교육을 시키는데 간단한 문장 읽기, 듣기, 말하기 테스트를 통과해야 수강생 자격을 얻는다. 학원비 30여만원에다 교재비 등을 더해 월 40여만원을 내야 하지만 수강생들이 줄을 잇는다. 이 학원 관계자는 "일찍부터 영어를 접한 아이들이 아니라 아예 알파벳부터 가르쳐야 할 정도면 기초 레벨 수업도 따라잡기 어려워 아예 받지 않는다"며 "영어 조기 교육은 이미 대세이고, 부모의 교육열과 경제적 수준에 따라 아이들의 영어 수준이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 아니냐"고 했다.
◆언제,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벌써 영어 스트레스를 받나 봐요." 주부 이혜련(35'대구시 수성구) 씨는 6살 난 아들이 영어만 귀에 들리면 움찔 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돌이 지나면서부터 아이에게 영어 동화책을 읽어주고 영어 애니메이션을 끊임없이 보여주며 단어를 익히게 한 것이 후회된다. "영어 동화책을 펼쳐들면 아이가 질색해요. 영어 단어 카드를 내밀어도 짜증을 내죠. 제가 학교 다닐 때 영어 때문에 애를 먹어 아이만큼은 영어를 잘하게 하고 싶었는데…, 너무 욕심을 부린 걸까요?"
일부 학부모들은 영어 조기 교육의 후유증을 호소한다. 아이가 영어를 외면하거나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하는 지경에 몰리기도 한다는 것.
용지초교 황소라(30) 교사는 "학원 교재를 보면 수염뿌리, 곁뿌리 등 생물 수업 용어까지 영어로 쓰고 외우게 하기도 하는데, 아이들에겐 지나치게 어려울 뿐 아니라 실제 영어 실력을 늘리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 의문"이라며 "사교육 쪽에서 지나치게 고난도의 수업에 시달리다 지쳐서 학교에 오니 영어 수업 자체에 흥미를 잃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구시교육청이 내년부터 시범학교 20개교를 선정해 초교 3, 4년생 영어 수업 시수를 2시간에서 1시간씩 늘리고 원어민 영어 교사를 추가 확보하는 등 영어 공교육 강화에 나섰지만, 영어 조기 교육에 대한 학부모들의 믿음은 뿌리깊다. 학원가에서는 "국가영어능력평가시험이 완전히 자리를 잡으면 공교육에서 말하기, 쓰기 준비가 어려우니 학원을 이용하는 것이 유리하다"며 학부모들의 불안감을 부추긴다.
전문가들은 영어 조기 교육에 신중히 접근할 것을 권하고 있다. 경북대 영어교육과 이예식 교수는 문자와 언어를 연결한 공부는 6세 이후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이 교수는 "빠른 시기에 접할수록 원어민에 가까운 영어를 구사할 확률이 높아지는 게 사실"이라며 "5세 미만 아이에게는 단어의 발음을 들려주고 그 단어에 해당하는 것과 연결 짓는 연습을 한 뒤 6세 이후 문맥에서 단어를 추출, 발음 중심으로 연습시키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초교 이후로 본격적인 학습 시기를 늦춰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계명대 유아교육과 권민균 교수는 유아들에겐 일주일에 한두 시간 정도 영어를 들려주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했다. 권 교수는 "유아들은 놀이를 통해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성장해나가는데 영어를 쓰면 복잡한 놀이를 하기 힘들어 결국 교재에 의존한 학습이 돼버린다"며 "일부 영어 조기 교육 학원처럼 유아들에게 주당 6시간씩 영어를 익히게 하는 것은 사회와 교감하는 수단인 모국어를 충분히 배울 기회를 놓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경북대 사대부속중학교 백채경(48'여) 교사 역시 "중 1년생들에게 영어가 재미있느냐고 물으면 손 드는 아이들이 거의 없다. 지나친 선행학습이 부담으로 작용한 것"이라며 "조기 교육은 초교 때 영어를 꾸준히 들려주고 발음과 간단한 단어를 익히게 하는 정도가 무난할 것"이라고 했다.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전문가들이 말하는 영어의 속설
1. 영어 교육은 어릴 때일수록 좋다(△)-영아 때부터, 만 6~13세 사이, 사춘기 이전 등 적정 교육 시기를 두고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단, 아이가 영어에 관심을 가질 때라는 전제는 같다.
2. 영어는 원어민 교사에게 배우는 게 최고다(Ⅹ)-자질이 부족한 원어민보다 상호 교감할 수 있는 한국인 교사가 더 나을 수 있다.
3. 유학은 필수다(Ⅹ)-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샌다. 뚜렷한 목적과 동기가 없으면 안 가느니만 못하다.
4. 모국어는 외국어를 배우는 데 장애물이다(Ⅹ)-문장을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구성하는 작업이 기본인 것은 어느 나라 말이든 같다. 모국어를 이해해야 외국어도 빨리 는다.
5. 원어민과 똑같이 발음해야 말이 통한다(Ⅹ)-영어를 배우는 목적이 의사소통이라면 원어민 식 발음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문장만 정확하다면 훌륭한 영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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