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 속의 인물] 타협의 명수, 헨리 클레이

1800년대 중반 미국 의회 지도자, 연방주의자로 주정부와의 갈등에서 중요한 해결안들을 마련, '위대한 타협가'로 불렸다. 국무장관을 지냈지만 두 차례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는 좌절도 겪었다. 정쟁과 갈등을 일삼는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1777년 오늘, 버지니아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헨리 클레이는 공화당(휘그당) 소속의 상원의원, 하원의장 등을 지냈다. 1820년 미주리주의 노예제 연장 논란과 1833년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반발을 부른 관세법 갈등을 적절한 타협안으로 매듭지었다. 1850년에는 텍사스 등 새롭게 편입된 주에 노예제를 실시하는 방안에 대해 타협안을 마련했으나 이번에는 성사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남북전쟁을 10년간 유예시키는 효과를 발휘했다.

1852년 그가 76세의 나이로 숨진 뒤 일어난 남북전쟁(1861~1864)에 대해 "클레이 같은 인물이 있었다면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링컨 대통령도 "내 이상형인 위대한 인물"이라고 추모했다. 1957년 미국 상원은 그를 동시대에 활약했던 다니엘 웹스터, 존 C. 칼훈 등과 함께 '5인의 위대한 상원의원'으로 선정했다.

김지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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