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주요 도로는 한양을 중심으로 종착지와 연결 방식에 따라 서로(의주방향), 북로(경성방향) 등으로 정하고 한양~동래 부산포 간 도로를 '경상충청대로', '경상대로'라고 칭했다. 특히 충주'죽산 등 조령 북쪽 사람들은 남쪽 지방을 '영남', 이쪽으로 가는 길을 '영남 또는 경상도로 가는 큰길'(영남대로)이라고 불렀다.
영남대로는 총연장 380㎞로 조선시대에는 한양과 부산 동래를 잇는 최단코스였다. 이 가운데 상주를 통과하는 영남대로 구간은 전체의 약 10%인 34㎞이다.
영남대로는 조선시대 지방과 지방의 연결고리이고, 서울과 부산을 잇는 지름길로 과거객들이 많이 이용했다. 그 주변 마을에 얽혀있는 조상의 흔적과 숨결이 구한말 근대문명이 발달하기 전까지 유지돼 왔지만 국도와 고속도로 등의 건설로 쇠퇴해 흔적마저 사라지게 됐다.
◆국도와 고속도로 건설로 쇠퇴
영남대로를 의성 낙정리(낙동교'옛 상주땅)에서부터 상주 북서쪽으로 함창읍 윤직리를 거쳐 문경 모전동에 이르기까지 걸어보면, 낙동~상주 성동까지는 옛 국도로 걷기에 불편하지만 상주~문경 간은 아직도 마을과 농로로 연결되는 구간이 대부분이어서 누구나 쉽게 걸을 수 있다.
영남대로 상주 구간은 사벌면 하덕곡에서 함창읍 태봉산까지는 금곡현로(32.2㎞)와 송현로(33.9㎞) 등 2개 노선으로 나뉘어져 이용됐지만 송현로보다는 표고와 경사가 낮은 금곡현로를 주로 이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대로에 두산성'덕봉성'이부곡성'병풍성이 인접해 있고 불현'성골고개'송현'금곡현'봉우재를 넘어야 했다. 영남대로 주변에는 낙동역'낙원역'덕통역과 발참이 있었으며, 원(院)은 윤직리의 당교원, 태봉리의 관천원, 목가리의 송원, 헌신동의 안빈원, 낙동리의 요제원 등 5개가 있었다.
강과 하천은 낙동강과 나한천'이안천'동천'남천'장천 등 5개 하천을 횡단해야 했고, 강과 하천을 건너는 나루는 이안천의 봉황대나루와 낙동의 낙동나루가 있었다. 이렇듯 상주구간 영남대로에는 조상들의 숨결과 얼이 서려 있다.
◆영남대로가 처음으로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낙동나루
낙동은 영남대로 중에서 유일하게 낙동강을 횡단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나루가 있는 곳이다. 의성 단밀면 낙정리에서 상주 낙동면 성동리까지 10.5㎞ 구간이다. 낙동은 육로와 수로를 잇는 곳으로 육지의 농산물이 낙동강 하류로 내려가고 바다의 수산물이 육지로 올라오는 바다와 육지의 교류 지점으로 조선시대까지 그 명맥을 유지해 왔으나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신작로 개설 등으로 도보교통이 쇠락한데다 홍수로 인한 낙동강 범람과 낙동강 연안개발 사업으로 옛 자취를 찾아 볼 수 없게 됐다.
부산 동래에서 출발한 영남대로가 처음으로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곳인 '낙동나루'는 원산'강경'포항과 함께 우리나라 4대 수산물 집산지로 꼽히면서 최대의 상권을 형성했다. 이곳은 의성과 선산이 만나는 지점으로 시장과 객주촌이 형성, 부산 구포에서 출발한 나룻배가 낙동나루에 소금과 수산물을 내리고 쌀과 곡물을 아래로 실어 나르는 물물교환 장소로서 소금배와 상선들이 꼬리를 물었다.
상주 낙동면과 의성 단밀면을 잇는 낙단교가 건설되기 전 낙동나루는 양 지역 간 유일한 물물'문화교류의 통로였다.
낙동역의 반대편(서안'西岸)에 위치한 진두리에는 대규모 시장과 마을이 있었다. 북동쪽의 원마에는 의성 단밀면 생송리 밤실로 건너는 뒷디미나루가 있었다. 낙동나루는 큰 배가, 뒷디미나루는 작은 배가 운항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34년 대홍수로 앞 변두리의 객주가(客酒家) 및 일본인 가옥들이 피해를 당한 뒤 100여 호의 취락이 이주하고 구 객주터는 경지로 바뀌었다. 이후 1980년대 낙동강연안개발사업으로 제방이 축조되면서 옛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으며 지금은 여관 등 위락시설이 들어선 '낙동휴양단지'가 조성돼 있다.
낙동면 낙동리 낙동중학교 안쪽 담장 밑에는 상주목사 불망비 6개와 이방비 3개가 세워져 있는데 이는 옛날 낙동리 영남대로 주변에 세워져 있던 것을 이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주문화연구회 김상호 회장은 "당시 목민관의 선정비를 세우는 위치가 일반인이 많이 다니는 큰길 주변이었다는 것에 근거할 때 목사 영세불망비 6개는 1808~95년에 세워진 것으로 선정비 주변이 구한말까지 대로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상주 낙동면 구잠리 불현에서 성동리까지 약 4㎞의 구간은 낮은 두 고개 사이에 장천이 흘러 낙동강에 합류되고 장천 주변은 낮은 분지로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아 각종 고분이 산재해 있다.
영남대로 구간에서 거북바위에 당산제를 지내온 마을, 낙동면 신상리. 국도에서 마을의 서남쪽에 위치한 갑장산 주봉을 향해 1㎞ 정도 올라가면 큰 마을에 '상(上)신단', 작은 마을에 '하(下)신단'이 있다. 상신단은 남신, 하신단은 여신으로 모시고 있다. 매년 주민들이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제를 올렸으나 지금은 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 신상리에는 구석기 주거지 등 유적이 많이 분포돼 있고, 석기 등 유물도 다량 출토된 곳으로 청동기시대의 지석묘와 삼국시대 고분군이 조영된 다양한 문화복합체를 형성하고 있다.
낙동역에서 상경할 때 첫 번째로 넘어야 하는 고개가 불현이다. 낙동에서 국도 25호선을 따라 부치대이로 올라가면 나온다. 불현 고갯마루에도 옛길 옆에 비석들이 세워져 있다. 불현은 구잠리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불상석이 있어 길손들이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옛 영남대로 옆인 구잠리 산 56번지에는 4개의 목사와 이방, 군수의 불망비가 서있어 옛 길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자개가 웅거했다는 병풍산성
낙동면 성동리 병풍산 아래 고개(해발 80m)에서 사벌면 목가리(해발 125m)까지 15.1㎞ 구간은 상주지역 영남대로 중에서 가장 높은 고개(송현)이다.
이 구간에는 아자개가 웅거하였다는 병풍산성과 병풍산'헌신동'성동리 고분군이 밀집해 있고 공성의 웅이산에서 발원하는 상주의 남천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병풍산 동쪽에서 낙동강과 합수된다. 또 낙상동에는 낙원역과 원(院'고려와 조선시대 주요 도로상에 여행자를 위해 설치한 여관), 발참(군인들이 말을 갈아타는 역참), 그리고 영남대로가 조선 후기까지 있어, 고대부터 조선까지 교통의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또 당시 길손들의 목을 축이게 했던 목가리의 송원 옆 '대정원'이라는 샘은 아직까지 마을의 간이상수도로 이용되고 있다. 목가리의 송현은 옛 도로의 형태가 가장 완전하게 남아 있는 곳이기기도 하다.
병풍산성은 상주시내에서 동쪽으로 5㎞지점, 상주시 병성동과 낙동면 성동리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옛 사벌국고성과 후백제왕의 아버지인 아자개가 이 성에 웅거했다는 '상산지'의 기록과 삼한시대 축성했다는 견해가 있으나 지표조사 결과 성곽 관련 유물에서 고려~조선시대에 이르는 와편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6~7세기의 병풍산 고분군과 관련된 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병풍산 일대에는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125호인 병풍산 고분군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지역이 병성동'헌신동'외답동, 낙동면 성동리까지 연결된다.
상주 북쪽으로 16리에 위치한 나원마을에 낙원역이 있었지만 현재는 낙상동 849의 4번지에 마차와 마부 형상의 조형물을 제작, 설치하는 등 소공원화했다. 마을 뒤 100여m 되는 도룡산 기슭에는 마당(馬堂)이 있어 매년 정월보름 말 꽁지 털을 문주에 걸어 놓고 동제사를 올렸다 해 '마당제'(馬堂祭)라고 불렀다. 그 마당은 중부내륙고속도로 용지에 편입, 철거되고 없다.
사벌면 목가리 해발 125m에서 함창읍 덕통리 덕봉성까지 4.8㎞ 구간에서는 송현을 넘어 이안천을 건너고 함창평야를 태봉산 옆으로 해 덕통역이 있었던 덕통으로 들어갈 수 있다. 덕봉산에서 서남쪽으로 내려온 줄기에 덕통리와 척동리 마을이 나타나며 함창초등학교 영동분교 남쪽 골짜기인 범골과 척동리의 북서쪽 사이 봉굴재를 넘어 영남대로가 나 있다.
이 구간에도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정착해 살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1934년 대홍수로 태봉마을이 유실, 마을 전체가 현재의 마을로 이주했다. 태봉마을은 영남대로에 접해 있어 주막촌이 형성됐고 일제강점기 때에는 일본군의 병참부대로 이용되기도 했다.
봉굴재를 올라서면 덕봉에서 내려오는 산줄기가 두산까지 낮은 능선과 계곡을 만들면서 연결돼 있는데 덕봉에서 두산까지는 산능선을 타고 영남대로가 연결된다.
이 길의 남쪽에는 이안천이 만들어낸 함창평야가 펼쳐지고, 북쪽에는 영강이 만들어낸 점촌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의 덕통리에는 덕통역이 있기 전에 역이 있었던 터가 있고, 호연정과 두산산성을 거쳐 때때리까지 연결된다. 때때리는 당교(唐橋)로 경부선철도와 나한천으로 상주시와 문경시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영남대로 상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당교는 신라시대의 김유신 장군과 당나라의 소정방, 임진왜란 때 정기룡'권응수 장군 등이 의병활동을 한 군사적 요충지와 교통의 길목으로 상주의 역사 속에 자주 등장하는 곳이다. 국도 3호선 확장으로 인해 당교의 흔적은 사라진 가운데 경부선철도 남쪽에 조그만 콘크리트 구조물만 남아있다.
상주'황재성기자 jsgold@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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