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 구국의 관리들, 그리고 잊지 말자!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관군과 관이 도망간 사이 영남 등 곳곳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왜적의 진격을 차단했고, 포기했던 바다에서는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잇따라 승리를 거두면서 조금씩 여유를 갖게 된 관군이 반격에 나서게 됐다.
육지에서는 정기룡(鄭起龍) 장군의 불패신화가 시작되고, 영천성 탈환에 이어 1592년 9월 8일 경주성 복성전투에서도 화포장인 이장손(李長孫)에 의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라는 새 무기의 개발 및 성 탈환 성공, 경상도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의 목숨을 건 의병모집 및 지원, 류성룡(柳成龍)의 헌신적인 임란 구국 활동 등 관(官)의 활약에 힘입어 전황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육지의 이순신, 60전 무패 신화의 상주 정기룡 장군
"우리 상주의 자랑입니다. 자부심입니다."
상주시내에서 15분쯤 달려 도착한 사벌면 금흔리 충의사(忠毅祠). '육지의 이순신' '임란 60전 불패 신화의 영웅' '육군의 성웅' 등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정기룡 장군을 모신 충의사는 고요함으로 낯선 방문객을 맞았다. 그리고 충의사에서 좀 더 달려 도착한 낙동강변 경천대에는 정 장군 동상이 서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안내 간판이나 설명 문구조차 없고 아예 말타기 놀이터나 사진 촬영 무대였을 뿐이다. 경천대를 찾은 관광객들에게 정 장군을 물었더니 낯설기만 한 인물이었다. "김유신 장군의 동상 아닌가요? 정기룡 장군은 6'25때 장군인가요?"
두 곳 모두 시내에서 벗어났고, 정 장군 어머니 무덤 아래 묻힌 그의 무덤과 꽤 떨어져 있는 탓일까. 충의사에도 무장다운 그를 느낄 수 있는 동상조차 하나 없어서일까.
상주향토연구소 곽희상 연구위원과 상주시 조용권 문화관광해설사에게 정 장군의 얘기를 듣고나니 후인들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주사람들의 장군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왜 그렇게 대단한지를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육지의 이순신 '이었고 육지에서 이순신 같은 신화를 시작한 인물이 그였다.
31세에 임란을 맞은 그는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킨 다음날인 4월 23일부터 28일까지 거창'추풍령 첫 싸움에서 왜적 100여 명을 사살한 첫 승리를 시작으로 60전 전승 행진을 이어갔다. 그 때문에 이순신 장군 등과 나란히 '해동명장전'에 이름을 올렸다. 또 4월 25일 조선 중앙정부군과 왜군과의 공식 첫 전투인 상주 북천싸움에서 빼앗긴 상주성을 그해 11월 23일 야간 화공 전술로 탈환했다.
충청'경상도를 오가는 전투에서 승리, 불과 1년 사이에 무려 10품계나 뛰어올라 전쟁 1년 만인 1593년 32세의 나이로 경상도북부 28개 고을을 관장하는 상주목사(정3품)가 되는 파격을 누렸다. 왜란 7년 동안 60전 불패의 전공으로 뒤늦게 1605년 1등공신에 추서돼 '임란 3영웅'이라는 이순신'권율'원균과 함께 이름을 남기게 됐다.
1622년 2월 28일, 삼도수군통제사로 근무하다 61세로 경남 통영 진중에서 생을 마친 그는 생전 어머니와의 약속에 따라 고향(경남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이 아니라 어머니 묘소가 있고 자신이 목사로 근무했으며 상주성 탈환에 피를 흘렸던 상주에 묻혔다. 그를 기리고 아끼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음에도 사당은 왠지 쓸쓸했다. 조용권 해설사는 "후세 사람들의 관심이 너무 없어 안타까울 따름"이라 말했다. 그나마 2008년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나를 성웅이라 부르라'가 출판됐다는 소식이 자그마한 위안이었다.
지난 2009년 설립된 '충의공 정기룡장군기념사업회'(회장 김명희 중모 중'종합고등학교 교장)가 지난해 처음 시작한 탄신제, 국궁대회에 이어 올해 전국규모의 탄신제 및 국궁대회, 전국 휘호대회'학생 백일장 및 사생대회, 시조'창 대회, 학술대회 개최 등 사업을 준비 중이어서 다행이었다. 김명희 회장은 "장군을 기리는 사업은 이제 시작 단계"라면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대한 추모 열기처럼 정 장군에 대한 축제 행사를 대대적으로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임란 공신 류성룡과 김성일
지난 주말 찾은 경북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 이황(李滉)의 위패를 모셨던 호계서원(虎溪書院)은 적막했다. 임진왜란 때 선조를 도와 큰 공을 세웠고, 이황 제자로 쌍벽을 이뤘던 류성룡과 김성일의 위패도 함께 모셨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우여곡절로 이황은 도산서원, 김성일은 임천서원, 류성룡은 병산서원으로 각각 위패가 옮겨졌고, 남아있는 강학 장소인 숭교당(崇敎堂)은 폐허 같았다. 안동댐 건설로 옛 장소에서 현재 자리로 옮겼다는 간단한 안내문 외에 이곳에 임란의 두 공신이자, 이황의 걸출한 두 제자가 함께 배향됐고, 임란의 두 공신 관련 사연이 서린 곳이란 설명은 어디에도 찾아볼수 없었다.
방치된 이곳을 찾는 사람도 없고, 사연을 아는 사람은 더욱 없었다. 안동시 최성달 문화'역사기록 담당은 "임란 두 공신을 모신 서원으로는 호계서원이 유일했으나 대원군의 사원철폐로 사당이 없어지고 위패가 옮겨가는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강당만 남아있다"고 했다.
지금은 두 공신의 위패가 떨어져 있지만 400년 전 임란 당시 두 사람은 동지였다. 1590년 일본 통신사로 갔다 이듬해 귀국한 부사 김성일은 함께 갔던 정사 황윤길(黃允吉), 서장관 허성, 종사관 황진의 의견과는 달리 왜군의 침략 가능성을 부인했다. 임란 10년 전 이이(李珥)의 십만양병설에 반대했던 류성룡도 김성일에 동조했다.
동인'서인 등으로 국론이 분열됐던 터라 일본의 침략 가능성 주장은 반대파에 의해 묵살됐다. 뒷날 피란길의 선조는 의주에서 당파를 탓하며 신세를 한탄했다. 미국학자 제임스 팔레(James B.Palais)는 후일 자신의 책 '조선의 유교정치-유형원과 후기 조선'에서 이이의 경고를 무시했던 류성룡이 10년 뒤 선조를 따라 압록강변 의주로 피란 온 자신을 돌아보고 큰 후회를 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임란이 일어나자 김성일은 경상우병사로 임지에 가던 중 책임을 추궁받아 서울로 압송되다 류성룡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그리고 경상도초유사(招諭使)로 임명돼 '일사보국 신지원야'(一死報國 臣之願也'한번 죽어 보국하는 것은 신의 바라는 바입니다)라며 1593년 4월, 56세로 숨을 거둘 때까지 의병 모집과 영남사수 임무에 진력했다. 그는 "진양(晉陽'진주)이 없으면 호남이 없고, 호남이 없으면 나라는 이미 어찌할 수 없게 된다. 적이 항상 침 흘리면서 엿보는 바가 이 성에 있다. 나는 맹세코 이 성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사수할 터이다"라며 진주성에서 싸우다 최후를 마쳤다.
류성룡 역시 정유재란 때 탄핵당해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할 때까지 선조를 보필했고, 1607년 5월 66세로 임종하기 전 '여기징 이비후환'(予其懲 而毖後患'내 지난 일을 징계한 뒤에 근심이 있을까 삼간다)이라며 불후의 역작인 '징비록'(懲毖錄)을 남겼다. 류성룡은 이순신 장군을 과감히 발탁도록 해 결국 제해권 장악에 성공, 나라를 구하게 했다.
지난 2001년 임진영남의병사 편찬에 참여했던 임란호국영남충의단 전시관 곽경열 관장과 안동시 최성달 담당은 "두 공신의 역할이 컸다. 류성룡은 끝까지 내외 정책을 수행했고 김성일은 경상좌도의 유학 거두 이황의 문하로서 남명 조식의 제자들이 버티고 있는 경상우도에서 그들의 협력으로 의병모집과 영남사수 임무를 해냈다"고 말했다.
올가을에는 김성일의 일본 통신사 귀국 보고 420년을 맞아 학술세미나가 열려 그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이뤄질 것으로 알려져 관심을 끌고 있다. 아울러 두 공신의 문중 후손들과 유림 노력 등으로 올해나 임란 발발 420년이 되는 내년쯤 호계서원에 두 사람 위패가 다시 봉안될 것으로 보여 임란을 되새기는 좋은 장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정인열기자 oxe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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