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가 이렇게 우리 사회의 뜨거운 화두가 됐던 적이 없었다. 미 하버드대의 마이클 센델(Michael Sandel) 교수가 펴낸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책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무려 17주나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면서 100만 부가 넘는 판매 기록을 세웠다. 또 이명박 정부는 지난해 하반기, 자신의 임기 후반의 정책 기조를 '공정사회'로 내세우면서 사람들은 또다시 '공정함'(fairness)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가지게 됐다.
사람들이 이처럼 '공정함'과 '정의'에 대해 강한 열망을 보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한국 사회가 예전과 비교해 더욱 불공정한 구조로 바뀌어 가기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다. 특히 '경제' 부문에 있어서 불공정은 도를 넘어서, 양극화 문제가 심각한 수준까지 치닫고 있는 것.
14일 한국사회경제학회가 주최한 '글로벌 경제위기와 경제학의 혁신'이라는 주제의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대구를 찾은 세계적인 석학 새뮤얼 보울스(Samuel Bowles'72'미국 산타페 연구소 소속) 교수를 통해 과연 '경제 정의'란 무엇이며, 경제적 관점에서의 '공정함'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현재 한국 사회의 가장 뜨거운 이슈는 '공정함'이다. 경제적 관점에서 봤을 때 '공정함'이란 무엇인가?
▶공정함의 문제에 대해서는 개념을 이야기하기 전에 어떤 것이 정의롭지 못한 것인지에 대한 사례를 이야기하는 편이 쉬울 것 같다. 아이가 환경 때문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다면, 가난 때문에 아픈 사람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다면, 그가 속한 그룹이나 인종으로 인해 차별을 받는다면 이 경우 대다수의 사람들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람들은 공정함이 매우 민감하고 복잡한 주제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특정한 사례를 통해 이야기를 나눠본다면 사람들은 어떤 것이 공정함인가에 대해 매우 강한 동의를 보인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우리는 과연 무엇이 불공정한 것인가에 대한 공동의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
내가 공정한가 공정하지 못한가를 따질 때는 지금의 상황이 그가 책임질 수 없는 '우연'(accidental)의 문제에서 비롯됐는가 여부를 고민해 보는 것이다. 성별이나 생김새, 국적 등은 내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어쩔 도리가 없는 요인으로 인해 내가 힘든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불공정한 것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 사람들은 이것을 평등의 개념과 혼동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공정'한 경제가 '평등'한 경제일 필요는 없다. 공정함이 평등함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수입이나 자산의 차이가 그 사람의 선택의 결과라면 물론 이런 선택의 결과가 동일한 기회선상에서 출발한 것이었다면 불평등은 공정할 수도 있다. 대다수의 평등주의자(egalitarian)조차도 '평등'이 목적이라고 말을 하지는 않는다. 이들이 평등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공정'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성장이 먼저냐, 분배가 먼저냐는 아직도 한국 사회의 주요 이슈 중 하나다. 특히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될수록 여기에 대한 고민은 깊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성장이 먼저냐, 분배가 먼저냐는 잘못된 질문이다. 성장과 분배는 동시에 이뤄져야 하는 것이지 무엇이 먼저라고 답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봐서 평등한 국가가 훨씬 경제 성장의 속도가 빨랐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아시아에서 빠른 시간 안에 눈부신 성장을 이룬 한국과 대만, 중국, 베트남 등은 상대적으로 꽤 평등한 국가다. 특히 대만의 경우는 뛰어난 사례가 된다. 15세기 급진적 개혁을 통해 토지 소유에 대한 평등이 확립된 바 있는데 이것이 나중에 빠른 경제성장을 달성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다. 흔히 평등을 위한 제도는 비효율적이라고 이야기하는데, 하지만 국가 간 비교를 통해 얻는 교훈은 평등할수록 경제적 성장도 빠르다는 것이다. 각 나라마다 이런 평등을 위한 다양한 제도가 있다.
-그러면 이런 '불평등' '불공정'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누구나 운이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 현대 사회 경제 문제의 상당 부분은 '운'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누군가는 예쁘게 태어나고, 누군가는 부유한 부모 밑에 태어나는 것이 그냥 '운'의 문제다. 나는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지원해야 한다는 부의 재분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운이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는데 이런 차이를 메워줄 만한 '보험' 등의 제도를 만든다면 분명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실업보험, 건강보험 등도 그런 예다.
미국의 경우에는 주택 가격의 등락에 따라 사람들의 부도 급격하게 변화한다. 이럴 때 주택 가치 보험(house value insurance)을 도입해보면 어떨까? 개별 주택에 대한 보험을 도입하자는 것은 아니다. 마을(town) 전체에 대한 보험 개념을 도입해 동네 평균 집값이 특정 수준 이하로 크게 떨어지면 보험을 통해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집값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사는 전 세계 많은 노동자들이 주택 가치 하락에 대한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될 것이며, 우리는 이런 방식을 통해 사회를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평등을 추구하다 보면 늘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이 문제다.
▶나는 평등주의자다. 그렇다고 내가 효율성의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다. 나는 누구보다 효율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다.
정말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지만 이것을 사업으로 실현할 만한 자본이 없는 사람의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은행에 돈을 빌리려고 아무리 애를 쓴들 그는 서류를 작성하는 귀찮은 과정조차 거쳐보지 못한 채 은행에서 내쫓기고 말 것이다. 하지만 평등이 실현돼 누구나 이런 아이디어를 현실에 적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많은 발전을 이룰 것이다.
지적재산권 역시 마찬가지다. 지적재산권으로 분류되는 상당수의 재화들은 한계비용(marginal cost)이 0에 가까울 정도로 낮지만 비용을 부담하게 함으로써 부자는 좀 더 쉽게 이를 활용할 것이고, 돈 없는 사람은 차별을 받는다. 만약 한계비용이 없는 지식을 사회적으로 누구든지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면 우리 사회는 더 높은 효율성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인데도 말이다.
-경제학에서는 인간을 이기적인 존재로 본다. 이것은 공정함과는 조금 상반되는 개념이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은 공정함과는 괴리가 있다.
▶사람들은 공정함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 경제학에서 흥미로운 실험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얼마간의 돈을 나눠주고 원하는 만큼을 타인과 나누라고 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평하게 나누는 쪽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더 가져도 아무런 불이익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것도 나라에 상관없이 대부분의 실험에서 이런 결과는 동일하게 나타났다. 이것은 사람들이 공정함에 대한 매우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사람들이 전체의 생산(outcome)을 증진시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몫을 희생할 의사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이렇게 불공정한 사회에서 살고있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좀 더 공정하고 싶어하지만 공정함을 증진시킬 수 있는 제도적 방법론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경쟁을 강요받는 데 너무 길들여져 있다 보니 '공정'이라는 개념이 '규칙(rule)을 지키는 것'으로 왜곡돼 나타나고 있다.
▶원칙을 지키는 것, 경쟁이 공정하다는 개념은 마치 사람들이 경제를 스포츠 관람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스포츠는 매우 정교하게 짜여진 룰이 있기 때문에 반칙 없이 승자와 패자를 가려 순위를 매길 수 있으며 경쟁이 정당한 것이 된다. 하지만 사회는 이와는 다르다. 다양한 반칙이 개입할 수 있으며 순위를 매겨 서열화하기가 힘들다. 인간 세상과 스포츠는 분명 다르기 때문에 룰을 지키는 것이 '공정함'이라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새뮤얼 보울스 교수는?=예일대학을 졸업하고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매사추세츠 대학(앰어스트)과 이탈리아 시에나 대학의 경제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뉴멕시코 주에 위치한 산타페연구소에서 행동과학 프로그램을 지휘하고 있다. 착취나 작업현장에서의 민주적 통제의 문제, 그리고 미국 자본주의의 축적 체제 등 좌파적 주제를 경제학 이론을 통해 분석해낸 선구적인 학자이다. 최근에는 경제주체의 선호, 제도의 역할, 그리고 진화를 주제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2006년에는 경제학의 지평을 넓힌 학자에게 주는 저명한 경제학상인 '레온티예프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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