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거칠고 막막한 길위의 삶… 오늘도 대구역에서 잔다

'큰누님' '형님' '본부장'… 거친 손이지만 따뜻했다

지난해 노숙인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구의 거리 노숙인은 150여명에 이른다.
지난해 노숙인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구의 거리 노숙인은 150여명에 이른다.
황희진 기자가 대구역에서 노숙체험을 하고 있다.
황희진 기자가 대구역에서 노숙체험을 하고 있다.

하늘을 이불 삼아 생활하는 사람들, 노숙인(露宿人). 역사 한구석에서 쭈그린 채 잠든 노숙인의 모습은 대도시의 그늘이다. 대구에도 한뎃잠을 자는 노숙인들이 많다. 특히 대구역은 노숙인들에겐 '천국' 같은 공간이다. 굶지 않고 끼니를 해결할 수 있고, 찬바람을 피할 은신처가 있기 때문.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거칠고 막막한 길 위의 삶을 3박 4일간 함께 겪어봤다.

◆"왜 자꾸 쳐다보는데!"

늦은 오후 대구역 대합실로 들어섰다. 지금부터 나흘 동안 노숙인으로 살아야 한다. 대합실 구석 의자에 앉아 사람들을 지켜보기로 했다. 시간이 흐르자 일반인과 노숙인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누추한 행색으로 오랫동안 멍하게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하거나 느린 걸음으로 대합실을 서성대는 사람들, 아예 의자에서 쪼그려 잠을 자는 이들이 노숙인이다. 그러나 다가설 용기가 쉽게 나지 않았다. 좀 더 '상냥한' 얼굴의 노숙인을 찾아보기로 하고 대합실을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왜 자꾸 쳐다보는데." 앙칼진 목소리가 등 뒤에 팍 꽂혔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30대 초반의 여성이 팔짱을 낀 채 노려보고 있다. 대합실에서 몇 번 눈이 마주쳤던 여성이었다. 여인의 언성이 높아지자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쏠렸다. 난감한 상황.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죄송합니다'며 굽실거렸다. "당연히 사과해야지. 별꼴이야 정말." 그녀는 도끼눈으로 한참을 쏘아보더니 자리를 떴다. 옆에 있던 청소부 아주머니가 "노숙인은 아닌데 매일 대구역 대합실에 놀러와 노숙인과 어울리는 여성"이라고 귀띔했다.

잔뜩 쪼그라진 가슴으로 이리저리 걸어다녔다. 오후 8시가 넘자 역 안에 있던 노숙인들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역 뒤편 노숙인 무료급식소에서 밥을 먹기 위해서다. 이날 메뉴는 소고기국밥. 무료 급식을 찾는 이들이 모두 노숙인은 아니다. 장을 보러 나왔다가 끼니를 해결하고 돌아가는 노인이나 일용직으로 막노동을 하는 이들도 있다. 노숙을 하다 쪽방을 구해 떠난 이들도 가끔 이곳에서 저녁을 해결한다고 했다. 쭈뼛거리며 줄 끝에 섰다. 조금 싱거웠지만 김치를 얹어 먹은 뒤 대합실로 돌아왔다. 노숙인들의 '잠자리 명당'은 대합실 한복판이다. 공기도 훈훈하고 늘 여러 명이 모이기 때문에 보온 효과도 있다. 백화점으로 통하는 입구와 비상계단에 종이박스나 돗자리를 깔고 이불을 칭칭 두른 사람도 있었다. 온기는 덜하지만 혼자 넓게 누울 수 있는 덕분이다. 대합실 의자 맨 뒷자리에 잠자리를 잡았다.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 봐도 팔과 어깨가 결렸다.

◆"삼촌, 막걸리 한 병 안 살래요"

다음날 오전 갑작스러운 소란이 일었다. 멍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역무원들이 대합실 의자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노숙인들을 깨워 쫓아내고 있었다. 오전 통근열차 승객들이 오기 전에 대합실을 비워두기 위해서다. 쫓겨난 노숙인들은 대부분 대구역 후문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눈 뜨자마자 다시 술자리가 벌어졌다. 무리에 섞이지 못하고 비상계단에 쭈그리고 앉았다. "삼촌, 막걸리 한 병 안 살래요. 앞에 마트에 가면 1천원밖에 안 해요." 놀라 돌아보니 50대 여성이 서 있다. 이틀 만에 처음으로 말을 걸어준 '고마운' 노숙인이다. 그녀는 대구역 노숙인들 사이에서 '큰누님'이라 불린다. 대구역에서 어울려 먹고 자는 여성 노숙인은 그녀가 유일하다.

얼른 달려가 막걸리 3병과 과자를 사왔다. "열쇠고리 예쁘죠." 한잔 걸친 그녀가 만화캐릭터가 그려진 열쇠고리를 꺼내 흔들었다. "집 열쇠 하나 없는 노숙 신세에 무슨 필요가 있겠어."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그녀는 표준어에 경상도 사투리를 섞어서 말했다. 서울 출신에 결혼도 했었고, 아들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남편과 불화로 이혼한 뒤 큰 교통사고를 당했고, 치료비와 생활비를 감당하기 위해 이리저리 빚을 내 쓰다 감당할 수 없는 처지로 몰렸고 결국 20년 전부터 하늘을 이불 삼는 처지가 됐다고 한다. 요즘도 날씨가 쌀쌀하고 비가 오면 사고 후유증으로 온몸이 시리고 고통스럽다고 했다. 하지만 괴로운 육체보다 더 가슴을 저미는 건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다.

"아들의 결혼 소식도 들었고,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알지만 찾아갈 용기가 없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이 모습으로 어떻게 나타나겠어." 막걸리 3병을 모두 비운 뒤에야 그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녀와 대구역 대합실로 걸어가는 동안 그녀는 내내 기자의 팔을 잡고 손을 어루만졌다. 술과 그리움, 추억에 취해 그녀는 아들을 만나는 꿈을 꾸는 듯했다.

◆이름을 묻지 않는다

다음날 오전 막걸리 한잔에 제법 친해진 '큰누님'과 노숙인 10여 명이 대구역 후문 광장에 모였다. '큰누님'을 빼면 모두 처음 말을 섞게 된 사이다. "28세로 경북 안동에서 친구들과 함께 사채를 썼다가 갚지 못하고 무작정 대구역으로 도망쳤다"고 둘러댔다. 어디에 가든 '신참'은 심부름꾼이다. 소주와 막걸리, 과자 안주를 부지런히 사다 날랐다. 노숙인들의 술판은 조촐하다. 술은 소주 아니면 막걸리, 주로 과자를 안주 삼아 먹지만 가끔 어묵이나 소시지, 통닭이 오르기도 한다. 먹던 안주를 버리는 경우는 없다. 남은 안주는 다음 술자리에서 그대로 접수한다. 술값은 구걸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대구역 주변에서 행패를 부리기도 한다. 일부 노숙인은 롯데백화점 인근 주차장에 세워둔 직원들 차량에 소변을 본다고 했다. 몇천원이라도 주면 그만뒀다가 며칠 뒤에 다시 소변을 보고 돈을 요구한다.

술판이 무르익자 반말과 훈계가 거친 말투로 쏟아졌다. "야! 니 아예 눌러앉아 생활할라꼬 왔나? 빨리 떠나래이. 여기 오래 있어 봤자 좋을 거 하나도 없다." "젊은 놈이 뭐하러 여기까지 들어왔노. 여는 인생 종친 사람들이 하루하루 빌빌거리며 사는 곳이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큰누님'이 만류하고 나섰다. "너무 그러지들 마라. 가족들 두고 도망쳐서 한뎃잠을 자는데 얼마나 무섭고 막막했겠어." 대구역에서만 8년째 노숙을 해 별명이 '대구역 본부장'인 노숙인이 한마디 했다. "촌에 닭하고 토끼 키우는 작은 농장이 있는데 같이 내려가서 가축이나 치면서 조용히 살자." 노숙인들은 내게 내키는 대로 호칭을 붙였다. '아우' '꼬맹이'는 정감 있게 들렸고 '신참' '신삐리' 소리에는 겁이 나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이름을 묻는 이는 없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노숙인들끼리 이름을 부르는 일도 거의 없었다. 언제 어디로 갈지 모르는 방랑객들에게 이름은 부질없는 호칭인 듯 싶었다.

◆거친 그의 손에는 온기가 있었다

쌓이는 술병만큼 분위기도 화기애애했다. 이진수(가명·45) 씨가 술을 산 기자가 안쓰러웠는지 담배 한 개비를 권했다. 그러자 30대 중반의 노숙인 '건수'가 소리를 지르며 이 씨의 얼굴에 소주를 끼얹었다. "이 양반아, 담배가 있으면 동고동락하는 사람들 먼저 줘야지. 와 풋내기한테 먼저 주노." 그는 이곳에서도 노숙인들의 개인정보를 팔아먹기로 악명 높다. 이 씨가 귓속말을 건넸다. "저 인간은 사기꾼이니까 믿지 마라. 주민등록증 주면 절대 안 된다." 이 씨는 대구노숙인상담센터로 내 손을 잡아끌었다. 노숙인 등록을 하면 따뜻한 방에서 묵을 수 있다는 게 이유다. 상담센터에서 이 씨와 기다리는데 '건수'가 다시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이 씨에게 욕을 퍼붓던 그는 이 씨를 넘어뜨리고 발길질을 해댔다. 그의 뒤통수에 피가 철철 흘렀다. 반항조차 못하던 이 씨가 조용히 한마디 건넸다. "꼬맹아,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빨리 떠나거라. 여기 있으면 이런 꼴 계속 당한다."

취재가 끝나고 며칠 뒤 담배와 안줏거리를 챙겨들고 대구역 뒤편 비상계단을 찾았다. 어김없이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니 오랜만이네. 어디 가 있었노." 차마 기자라는 말이 떨어지질 않았다. "공장에 취직을 해서요." "이야, 참 잘됐네." 한 노숙인이 안주로 먹던 바나나를 뚝 떼어 건넸다. 그들이 먹던 안주의 절반이다. 그는 내 손을 계속 어루만졌다. 자갈밭처럼 거친 손이지만 따뜻했다.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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