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1922.5.8~2009.2.16·이하 수환)은 1922년 음력 5월 8일 대구 남산동에서 태어나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대구 계산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대구가 낳은 위대한 종교인이다.
김수환은 다섯 살 때 가족을 따라 군위로 이사하게 되었고, 여덟 살 때 군위보통학교로 진학하였다. 5년제 군위보통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어머니가 수환을 안방으로 조용히 불렀다. 전에 없이 근엄하면서도 침울한 듯한 어머니의 묘한 표정에 어린 수환은 숨을 죽이며 눈치를 살폈다. 어머니는 겁먹은 아들이 안쓰러운 듯 수환을 끌어당겨 꼭 안아주었다. 어머니 품에 안긴 수환의 뺨에 당신의 뜨거운 눈물이 떨어졌다. 아버지와 일찍 사별하였으나 조금도 기죽지 않고 5남 3녀, 8남매를 남부럽지 않게 키우며 꿋꿋하게 살아온 어머니가 갑자기 눈물을 보이는 모습은 수환에겐 너무나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영문도 모르고 수환은 어머니와 같이 울었다. 한참을 울던 어머니는 감정을 겨우 수습하고 다시 냉정을 되찾았다.
"수환아, 보통학교 졸업하면 뭐 할래? 계속 진학하고 싶지?"
"엄마, 졸업하면 돈 많이 벌어 엄마 호강시켜 드릴게요. 읍내 서점이나 문방구 같은 데 점원으로 들어가서 열심히 일하고 저축해서 대구로 나가 점포를 얻어 장사할래요. 그래서 돈 많이 벌어서 엄마 맛있는 거 많이 사드리고 집도 사드리고 농사지을 땅도 사드리고 예쁜 옷도 사드릴게요. 성지순례도 보내드리고, 바티칸 여행도 보내드릴게요. 엄마, 꼭 호강시켜 드릴게요. 그리고 스물다섯 살쯤 되면 참한 색시 만나서 결혼도 하고 손자, 손녀도 낳아 드릴게요. 엄마는 그때까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면 돼요."
"우리 아들, 착하기도 하지. 그렇지만 엄마는 그런 호강 원치 않는단다. 그냥 성모님 곁에서 주님 뜻에 따라 우리 불쌍한 백성의 영혼을 좋은 곳으로 이끄는 그런 사람이 되어주면 여한이 없겠다."
"……."
"수환아, 성당에 계신 신부님같이 훌륭하신 분이 되고 싶지 않니?"
"내가 신부님이 될 수 있어요? 너무 어려울 것 같아요."
"물론 신부님 되기는 어렵고 힘이 들지. 그렇지만 넌 될 수 있어. 신학교를 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수도를 하면 넌 반드시 훌륭한 신부님이 되어 많은 불쌍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영혼을 구제할 수 있을 거야."
"그럼, 엄마는 어떡하고?"
"엄마는 걱정 마라. 너희들이 주님 품에 있으면 나는 아무 걱정 없이 잘 살아갈 수 있단다."
"엄마, 그럼 신부가 되면 결혼도 하면 안 되나요?"
"그럼, 신부님은 평생 주님을 섬기고 살아야 하는데 결혼을 하면 안 되지."
"형님들도 모두 다 신부님이 되라고 해봤나요?"
"나야 모두 다 신부님이 됐으면 했지만 그게 또 인력으로 안 된단다. 동환이만 신부님이 된다고 했다. 네가 좋다고 하면 우리 집안에 신부님이 두 분이 탄생할 판인데 그것만 해도 우리 가문의 영광이다."
"엄마, 나는 돈 많이 벌어 엄마 호강시켜주고 수경이같이 예쁘고 착한 여자하고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 엄마 모시고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내가 신부님이 되어 돈도 못 벌면 팔 남매 키운다고 고생하신 울 엄마, 호강도 못 시켜드리고 나는 그야말로 천하의 불효자가 되는 거 아닙니까?"
"엄마는 호강, 그런 거 안 바란다. 그러니 돈 벌 생각 하지 말고 엄마 말 들어라. 돈이라는 거, 벌기도 쉽지 않고, 나라도 없는 이 혼란한 세상에 주님의 품 안이 가장 행복하단다. 신부님도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삼대가 공을 들여야 신부님 한 분 날까말까 하단다. 너희 할아버지는 주님을 위해 순교하셨고 너희 아버지도 세례를 받고 고행을 마다하지 않으셨으니 너는 신부님이 되어 주님의 뜻을 받들 자격이 충분히 있다."
"신부님은 장가도 못 가고 혼자 사는데, 많이 심심할 것 같은데…."
"조그마한 녀석이 그래도 남자라고 장가는 가고 싶은 모양이지?"
"남들 하는 거 다 해보고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거지요. 엄마가 나를 꼭 신부님 되라고 하시면 신학교로 진학할게요. 그런데 다들 공부하면 돈은 누가 벌지요? 그럼 앞으로도 엄마 혼자 돈 번다고 계속 고생해야 하나요?"
"엄마는 너희들이 주님 곁에서 불쌍한 사람들을 도우며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는 게 가장 큰 낙이란다. 그러니 내 걱정일랑 말고 신학교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훌륭한 신부님이 되도록 해라."
"……."
수환은 어머니에게 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당신의 말씀을 더 거스를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는 신학교로 진학하려면 대구로 가서 예비학교를 졸업하고 성 유스티노 신학교로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 넷째 형이 밟은 과정이 수환을 고스란히 기다리고 있었다. 수환은 집을 나와 마을 뒷산 참나무 밑 너럭바위 위로 갔다. 그곳은 수경이와 여보, 당신 하며 소꿉놀이하던 곳이었다. 옹기조각, 사금파리, 돌조각 그릇에 각종 풀을 빻고 찧은 반찬을 담고, 모래로 지은 밥을 담아 수환에게 "서방님 진지 드셔요" 하던 해말간 수경이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다. 수경이는 수환과 한마을에 사는 소꿉친구로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고와 마을 또래 중에서 제일 인기 있는 소녀였다. 수경은 가슴이 봉긋하게 나온 것이 부끄러운지 수환을 보면 전처럼 살갑게 대하지 않고 얼굴을 붉히면서 피하는 것 같았다. 수환도 수경이 가까이 오면 괜히 당황스럽고 땀이 났다. 이제 신부의 길로 들어서면 수경과의 인연도 끝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수환은 너럭바위에 우두커니 서서 마을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슬픔이 눈물을 부르고 다시 눈물이 슬픔을 불렀다. 어둠이 마을을 온통 덮어버릴 무렵까지 수환은 속세와의 이별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 후, 수환은 대구의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교구의 소 신학교였던 동성상업학교(현 동성고등학교)로 편입하여 계속 신학을 공부하였다. 1941년 수환은 천주교 대구교구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상지대학(上智大學) 문학부 철학과에 진학하여 학업을 계속했으나 조국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독립투사들과 접촉하기도 했다. 당시 상지대학에 있던 독일인 게페르트 신부는 착하고 성실하며 똑똑한 수환을 매우 아껴주었고 수환도 박학할 뿐만 아니라 덕망 있는 게페르트 신부를 존경하였다. 어느 날, 게페르트 신부가 먼저 수환에게 말을 붙였다.
"미스터 김, 요즘 심경이 꽤 복잡한 것 같은데, 무슨 걱정이라도 있나?"
"예, 신부님.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워 온 세상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가고 있고 우리 민족이 나라를 빼앗긴 지 벌써 삼십 년이 넘어섰는데, 나만 이렇게 유유자적 신학을 공부하며 신부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인지 의문스럽습니다."
"미스터 김의 고민을 잘 이해하네. 가톨릭이 다소 형이상학적이고 사랑으로 영혼을 구제하는, 현실을 초월한 비현실을 지향하긴 하지만, 인간이 현실을 떠나 존재할 수 없듯이 가톨릭 또한 인간이 사는 현실 위에서 비로소 의미를 갖는 양면성이 있지. 한동안 정교일치 시대가 있었고, 가톨릭도 중세 때에는 세상을 정치적으로 지배하지 않았나."
"조상의 인도와 어머니의 독실한 신심에 이끌려 신부의 길로 들어섰지만 조국과 민족이 위기에서 신음하고 있는데 주님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적국에서 눈 감고 귀 막고 공부만 하고 있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선택의 연속이지. 누구도 순간순간 선택을 피할 수 없어. 직업 선택도 그 중 하나일 뿐이야. 직업은 다 신성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 길로 가라고 강요하지 않아, 강요해서도 안 되지. 미스터 김도 조상과 어머니의 인도로 신부의 길을 택한 것 같은데, 조상과 어머니가 강요한 것이든 아니든, 미스터 김이 신부의 길을 스스로 선택한 거야. 그렇지만 상황이 바뀌고 마음이 변하여 그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그 선택을 바꿀 수도 있지. 가끔 너무 많이 와서 돌아가기 힘들 때도 있긴 하지만 미스터 김은 사제 서품 전이라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지. 미스터 김은 지금 정치가가 되고 싶은가?"
"조국과 민족이 제가 필요하여 부른다면 기꺼이 달려가야지요, 그게 정치가라면 정치가가 되겠습니다. 신부님도 평소 생활 속의 신앙을 강조해오지 않으셨습니까? 신앙이 생활 속으로 가는 것이라면 비록 신부가 아니더라도 생활 속에서 신앙을 실천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옳은 말이야. 어떻게 보면 미스터 김의 민족이 겪고 있는 현실이 갑갑하여 당장 총을 들고 독립 투쟁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고 또 그렇게 하면 당장 가슴이 시원할 수도 있겠지만, 또 달리 보면, 주님의 가르침을 익혀 암울한 상태에서 고뇌하고 있는 미스터 김의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도 누군가 꼭 해야 할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
게페르트 신부는 그렇게 말하고는 성호를 그었다. 수환은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었고, 신학 공부를 잠시 중단하고 독립 투쟁에 뛰어들었다가 독립이 되고 난 후, 다시 신학을 공부하여 신부가 되는 방법에 대해서도 자문을 구해보고 싶었지만, 게페르트 신부는 휑하니 일어서서 어디론가 휘적휘적 가버렸다.
김수환은 신학대학을 휴학하고 넷째 형인 김동환 사제가 사목하던 부산의 범일성당을 방문하여 머문 적이 있었다. 그때 성당 부설 보육원에서 일하며 가끔 사제관의 잡일도 돕던 선희라는 여인이 있었다. 선희는 신심이 돈독하고 성실한데다 생김새도 후덕하여 범일 성당의 마돈나로 사랑받고 있었다. 청년 김수환은 독서량이 풍부해 신학, 철학은 물론 다른 학문에도 박학다식하고 세계정세에도 아주 밝아 범일성당에 머무는 동안 많은 신도들에게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였다. 그러다 보니 선희도 평소 궁금했던 것들을 수환에게 묻게 되었고 그때마다 모두 시원히 해결해 주었으므로 자연히 인생 상담도 하게 되었고 점차 마음까지 의지하게 되었다. 수환은 천성이 착하고 온화해서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정성을 다하는 스타일이었으므로 선희는 그가 자기에게 남다른 감정을 갖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다. 다만 신부의 길을 가고 있고 다소 내성적이라 수환이 먼저 사랑을 고백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수환이 계속 머무는 사람도 아니고 한 번 떠나가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여차하면 사제 서품까지 받을 수도 있는 까닭에 선희는 비록 여자이긴 하지만 자기가 먼저 청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수환이 비록 신학을 공부하는 예비 신부이긴 했지만 마음만 먹으면 쉽게 환속이 가능한 상태였으므로 연정을 품은 선희로서는 당연히 몸이 달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선희는 용기를 내어 수환에게 청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지만 그게 그렇게 녹록한 일은 결코 아니었다. 수환의 앞에만 서면 벌벌 떨리고 뜻하지 않은 엉뚱한 이야기가 튀어나와 버렸다. 수백 번의 리허설 끝에 선희는 겨우 청혼할 수 있었다. 함께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자는 선희의 청혼에 수환은 얼마나 놀랐던지 정신이 나간 듯 멍하게 서 있었다. 수환은 하루만 말미를 달라고 선희에게 사정했다. 선희는 얼굴이 벌겋게 되어 도망치듯 사제관을 뛰쳐나갔다. 수환은 성당을 나와 발이 닿는 대로 거리를 걸었다. 참나무 아래 너럭바위에서 소꿉친구 수경을 생각하며 몇 시간을 울었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밤이 새도록 걷고 또 걸었다. 수환의 마음은 순간순간 엎치락뒤치락 요동쳤다. 햄릿의 고뇌가 이보다 더할까 싶었다. 날이 새자 발길은 어느덧 성당을 향하고 있었다. 수환은 성모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그의 눈가로 물기가 번졌으나 눈동자에는 결기가 서렸다. 선희가 본당으로 들어서자 수환은 성호를 그렸다. 순간, 그녀는 모든 걸 깨닫고 체념하듯 고개를 숙였다.
"저도 선희 씨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제가 한 여인을 온전히 사랑할 자신이 없습니다. 대신, 많은 사람을 위해 도움을 주는 일에 제 평생을 바치겠습니다."
"……."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으나 선희는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김수환은 성직의 길에 대해 두 번 다시 의심하고 고뇌하지 않았고, 그런 일로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김수환은 1951년 9월 15일, 대구 계산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신부가 되었고, 1969년 3월 28일, 동아시아에서는 세 번째로 마흔일곱 살의 나이에 우리나라 최초의 추기경이 되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 시대 마지막 유생, 심산 김창숙 선생의 묘소를 찾아 유교식으로 술을 따르고 재배하는 등 열린 마음으로 다른 종교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였고, 생활 속에서 가톨릭 정신을 전통과 조화롭게 실천함으로써 한국 가톨릭의 융성을 이끌었다.
2009년 2월 16일, 김수환 추기경은 8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선종하기 직전에 각막을 기증함으로써 모든 국민들에게 사랑과 나눔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각인시켜 주었다. 항상 가난한 자, 소외받는 자의 편에 서서 끝없이 베풀었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그는 대구가 낳은 '위대한 큰 바보'로 우리들 가슴 속 깊이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오철환 소설가·대구광역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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