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2월. 삼성 라이온즈의 미국 전지훈련은 그해 통합 우승의 밑거름이 됐다. 태평양을 건너가 직접 보고, 배운 미국 야구는 야구의 기술뿐 아니라 선수들에게 덤으로 자부심을 안겼다.
김근석(자영업)은 "삼성 선수들은 홈런을 치고 베이스를 돌 때도 달랐다. 홈플레이트를 밟으며 하는 세레모니는 다른 팀이 흉내를 낼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됐다. '이게 바로 메이저리그 세레모니'라며 상대팀 선수에게 은근히 자랑했다"고 회상했다.
1984년 한국시리즈 패배는 코칭스태프와 선수들로 하여금 스파이크 끈을 단단히 조이도록 했다. 김시진(넥센 감독)은 그해 초 미국으로 전지훈련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매일 3시간 30분씩 뛰었다. 체력을 보완해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겠다는 뚜렷한 목표 때문이었다. 김시진은 굳은 결심을 행동으로 옮겼다. 다양한 구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려운 고비를 만나면 도망가는 피칭으로 나약함을 노출했던 김시진은 볼 컨트롤 연마에 구슬땀을 쏟았다.
그해 김시진은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정면 승부가 필요할 땐 당당히 맞섰다. 도망갈 일이 생기면 아예 싸움을 피했다. 고무줄처럼 조였다 풀었다 하는 투구에 타자들은 넋을 놓았다. 경기를 지배할 줄 아는 '냉정한 승부사'. 멋진 별명도 붙었다.
시즌 후 일본으로 건너가 개인 훈련을 했던 재일교포 출신 김일융도 그해 미국전지훈련에 동참했다. 초등학생을 둔 학부형, 당시 36세의 노장 김일융은 새로운 무기를 습득하느라 분주했다. 김일융은 LA 다저스 왼손투수 페르난도 발렌수엘라를 열심히 쫓아다녔다. 정동진(전 삼성 감독) 당시 코치는 "김일융의 집착은 대단했다. 단체훈련을 거른 채 발렌수엘라만 바라봤다. 재일교포 출신인 김영덕 감독이 김일융을 불러 심하게 꾸짖었으나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켜본 선수들은 일본어여서 내용은 알 수 없었으나 분위기는 상당히 험악했다고 전했다.
삼성은 전력보강으로 시즌 채비를 끝냈다. 1월 31일 간판 투수 이선희를 MBC에 넘겨주고 이해창을 데려오는 맞트레이드를 단행했다. 초창기 트레이드는 마치 쫓겨나는 것 같다는 인상이 선수들에게 강했다. 소속팀의 간판급 선수였던 이선희, 이해창은 씁쓸한 마음으로 팀을 옮겼다.
굳은 결심과 선진야구 경험, 전력 보강을 한 삼성은 시작부터 달랐다. 3월 30일 전년도 5위 해태와의 시즌 개막전(대구)에서 5대3으로 승리하며 통합우승의 서막을 열었다. 선발 김일융은 미국전지훈련에서 익힌 스크루 볼을 선보이며 완투(9안타 3실점)승을 챙겼다. 김시진은 4월 2일 인천 삼미전에서 4안타 무실점으로 6대0 완봉승으로 시즌을 열었다.
4월 6일 MBC 유니폼을 입은 이선희에게 패배를 당한 김영덕 감독은 다음날인 7일 시즌 전 구상했던 전문 마무리체제를 본격적으로 가동했다. '담(배짱)'이 커 낙점했던 권영호는 그날 2대1로 앞선 상황에 마운드에 올라 첫 세이브를 따냈다.
김시진-김일융 원투펀치에 권영호라는 전문 마무리 투수까지 갖춘 삼성은 4월 13일 인천에서 삼미를 10대7로 이기며 1위에 올랐다. 그 뒤 전기리그 우승까지 삼성은 단 한 차례도 정상을 뺏기지 않았다.
전기리그 하이라이트는 전년도 챔피언을 훔쳐간 롯데와의 시즌 첫 맞대결. 삼성은 한국시리즈에서 당했던 아픔을 대역전극으로 롯데에 되돌려줬다.
4월 16일 롯데와의 홈경기에서 삼성은 2대7로 뒤진 채 9회를 맞았다. 마운드에는 한국시리즈에서 4승을 챙겨간 롯데 최동원이 있었다. 1사 후 7번 김성래가 좌월 솔로 홈런으로 롯데의 침몰을 알리는 신호탄을 쐈다. 이어 대타 배대웅은 최동원의 2구를 노려 왼쪽 담장을 넘겼다.
경기장을 빠져나가던 팬들은 두 차례 함성에 발걸음을 돌려 대역전극을 만끽했다. 무쇠팔 최동원에게 9회 1사 후 5점을 뽑아내며 7대7 동점을 만든 삼성은 연장 13회 기어이 승리를 챙겼다. 볼넷으로 나간 장효조가 홍승규의 보내기 번트로 2루에 안착했다.
그런데 대역전드라마의 결말은 삼성이 방망이를 휘두르기 전, 롯데의 자충수로 끝나버렸다. 롯데 포수 김용운이 3루를 훔치려는 장효조를 잡으려고 세차게 공을 던졌으나 공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고 그 틈에 장효조가 홈을 밟아 삼성의 복수전은 끝을 맺었다.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의 악몽을 잠시나마 잊게 한 순간이었다.
반면 롯데는 이날 패배로 큰 혼란에 빠졌다. 7회 구원 등판한 최동원이 9회 5실점으로 경기를 망치자 숙소 분위기가 좋을 리 없었다. 강병철 감독이 최동원을 꾸짖자 최동원은 그 길로 숙소를 이탈, 잠적해버렸다. 고액 연봉의 최동원의 실망스런 투구에 발끈한 건 고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날 승리로 4연승을 이어간 삼성은 폭주 기관차처럼 질주해 연승행진을 '11'까지 늘리게 된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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