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는 누구인가? 이명박 대통령인가, 박근혜 의원인가. 정치판과 언론 종사자들 사이에 최근 들어 회자(膾炙)되는 이런 우문(愚問)에 즉각 대통령이라는 정답을 내놓을 사람은 놀랍게도 그리 많지 않다. '최고 권력자'라는 명칭 자체가 비민주적이라는, 진짜 정답은 아직은 이 나라에서는 언감생심이다. 그런데 대답을 망설이는 사람들은 대개 대통령이 이미 통치력을 상실한 절름발이 오리 신세가 돼 있다는 걸 아는 것이다. 기실 청와대의 의도가 집권 여당에게 먹혀들지 않은 지는 오래됐다. 그게 대통령 탓이든 아니든 대통령은 자신의 진영부터 권위를 잃었다. 대통령에게 각을 세우는 것이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하고 인기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니 당 최고위원들부터 대통령을 우습게 만들고 있지 않는가.
그 당 지도부는 사실 대통령의 실책보다 더 큰 실책을 저질러왔다. 보온병을 들고 폭탄이라고 설친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패착이다. 더 기막히는 건 여기저기 다 인심을 얻으려다 보니 당 대표가 태연히 '개혁적 중도보수'를 외치고 나선 것이다. 하긴 대통령부터 취임사에서 '이념을 넘어서서' 중도실용이라는 새 패러다임을 내걸지 않았던가. 중도보수도 괴이하지만, 점진적 변화를 추구하는 '보수'가 '개혁적'이라면 소가 웃을 일이다. 거기에다 야당보다 더 사나운 친박계가 경위야 어떻든 사사건건 어깃장을 놓는 걸로 비치니 국민들 눈에는 거대 여당이 지리멸렬한, '안 되는 집'으로 각인되는 것이다.
물론 한나라당의 위기는 이 정권이 저지른 경제정책의 실패가 가장 큰 원인이다. '경제를 살리겠다'는 딱 한 마디로 당선한 대통령은 업적주의에 매몰돼 대운하로 의심받은 4대강 살리기에 '올인'했다. 그게 강만 살리는 것이었다면 누가 뭐랄 것인가? 그런데 강을 살리는 걸 넘어 6m씩 강바닥을 파내고 10m도 훨씬 넘는 보를 세우고 자전거길을 만드는 등 난리를 치니 보수신문조차도 '토목공사'는 이제 그만하자는 말을 하게 됐다. 더욱이 전 정권 때 한번 무너진 중산층을 완전히 붕괴시킨 '물가대란'은 전적으로 이 정부가 내세운 고환율 탓이다. 그 덕으로 대기업들은 이 정권 들어 60~70%의 신장률을 기록하고 국민소득은 2만달러를 다시 넘었지만, 막상 중소기업과 서민들은 치솟는 물가 때문에 죽을 맛이다.
이 정권의 이런 '실정'이 박근혜 의원은 자신과는 무관한 것처럼 처신한다. 박 의원은 미디어법이든 세종시든 이 정권이 추진하던 정책의 '발목'을 잡아 왔고 그 때문에 여당 안에서의 야당이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어떤 정책에 대해 야당의 반응보다는 박 의원의 입을 더 주목하게 됐다. 문제는 박근혜가 '최고 권력자'처럼 보이는 이 현상이 한나라당은 물론 박 의원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여당이 분열하고 대통령을 우습게 만들면서 정권을 잡겠다는 것은 꿈이다. 과거 이회창 후보가 실패한 것은 개혁정신이 부족했던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속해 있던' 정권과 선을 긋고 척을 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박 의원의 경우 정권과 거리를 두는 것이 특별한 이념이나 신념이 이유가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박 의원에 대한 지지는 강고하다. '왜 대중은 박근혜에 미치는가?' 이 질문에 그녀가 원칙주의자이기 때문이라거나, 그녀가 보수주의자이기 때문이라는 자들은 친박계뿐이다. 그 지지의 대부분은 박 의원의 정책이나 철학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과 개발시대에 대한 향수 때문인 것을 세상이 다 안다. 오히려 박 의원은 '6'15선언'을 지지한 것 하나만으로도 보수주의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김정일의 적화통일정책에 불과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수용한 그 선언은 명백히 위헌이다. 그 선언을 지지하면서 헌법에 명시한 대통령의 의무인 '국가의 계속성'을 어찌 담보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군다나 박 의원은 수차례 '복지국가' 공약을 내걸고 있다. 복지국가는 모든 국가의 이상이다. 그러나 그건 진보좌파 정당의 정강이지 보수정당의 정강은 아니다. 나는 솔직히 박 의원의 철학이 '보수'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나라당이든 박근혜 의원이든 이제 용단을 내려야 한다. 한나라당도 더 이상 이념을 가장해선 안 된다. 그건 이 나라 대다수 보수를 능멸하는 짓이다. 박 의원도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한나라당이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새 진보정당으로 커밍아웃하든지, 보수성을 회복해 박 의원과 결별하는 것이 더 이상 국민을 속이지 않는 것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약속의 실천'이다.
전원책(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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