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 낙동강 시대] 40) 구미 남산(서원)마을 (2)

게 모양을 닮아 '끼발' 마을…옛날 선산감자·땅콩 명산지

서원(남산)마을 전경. 북쪽으로 남산이 둘러싸고, 남쪽으로 감천이 흘러 전형적인 배산임수형 명당이다.
서원(남산)마을 전경. 북쪽으로 남산이 둘러싸고, 남쪽으로 감천이 흘러 전형적인 배산임수형 명당이다.
감천에서 물고기를 잡기 위해 사용했던 어구인 꽈리.
감천에서 물고기를 잡기 위해 사용했던 어구인 꽈리.
감천과 감천 둔치는 예부터 고기잡이터이자, 놀이터였다. 27년 전 감천 둔치 이태리포플러 숲 앞으로 소풍을 나온 서원마을 주민들
감천과 감천 둔치는 예부터 고기잡이터이자, 놀이터였다. 27년 전 감천 둔치 이태리포플러 숲 앞으로 소풍을 나온 서원마을 주민들
원동들에서 대를 이어 땅콩을 재배하여 \
원동들에서 대를 이어 땅콩을 재배하여 \'경북도 땅콩 다수확왕\' 에 오른 윤근식 씨(왼쪽). 서원 토박이, 우윤봉 씨가 감천의 변화상을 얘기하고 있다.

낙동강과 감천(甘川)이 에두른 한적한 서원(남산)마을.

남산 기슭에 포근히 파묻힌 마을은 게의 모양을 닮은 남산의 끝자락에 있다고 '게발' 또는 '끼발'이라고도 불렸다.

구미시 선산읍 원1리 서원마을은 금오산의 금오서원이 옮겨올 만큼 명당이고, 감천과 낙동강이 빚어낸 원동들이 풍요로운 곳이다. 조선시대 소금배부터 1970년대 고기잡이와 농사용 나룻배까지 강창나루의 역사가 서려 있고, 섶다리와 잠수교, 남산교로 이어온 다리의 추억이 애틋하다.

낙동강이 조선시대 소금배의 역사를 담았다면, 남산은 조선시대 봉수대의 흔적을 안고 있다. 60여가구 타성바지들이 쪽빛 뫼와 풍요로운 물과 어우러져 옹기종기 몰려 사는 마을이다.

◆감천과 낙동강이 빚은 황금 들판, 원동들

구미지역 최대 곡창지 중 하나인 원동(선산)들.

낙동강과 감천의 풍부한 물을 머금었다. 남산이 북쪽의 모진 바람을 막아 방풍역할을 하고, 감천 상류에서 부단히 실어 나른 퇴적물이 마을 앞 감천과 낙동강이 만나는 지점에 쌓여 비옥한 평야를 만들어냈다.

원동들은 어강마을 근처의 '어강갯둑', 들판 중앙 좁은 개울 주변의 '도랑나들'을 비롯해 '사르터' '정지백이들' '개전' '말근리마' '선반나들' 등 위치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감천은 낙동강으로 합류하기 직전 S자형으로 사행하는데, 장마철이나 물이 많이 불어날 때마다 범람해 감천 북쪽 서원마을이나 남쪽 어강마을은 잠기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1981년 백마제방을 쌓기 전까지 서원과 어강 등 감천 주변 마을은 벼농사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백마제가 생기기 전, 원동들과 낙동강변의 주요 경작물은 땅콩과 감자였다.

윤근식(74) 씨는 "모래하고 사질토하고 이래 섞이면 양이 많이 나오고 색깔도 좋고. 하천부지가 다 그렇거든 땅이."라며 "옛날 분야별로 다수확왕이 있잖아. 땅콩으로 도 다수확왕을 받았지. 한 35년 전쯤 될거야"라고 말했다.

윤 씨는 아버지 때부터 낙동강 둔치에 감자, 감천 둔치에 땅콩을 재배해 왔는데, 좋은 땅을 잘 활용해 수확량을 높여 1970년대 경북도 땅콩 다수확왕 상을 받았다고 했다.

낙동강변 감자도 '선산감자'라는 이름으로 구미는 물론 전국적으로 연간 약 150t가량씩 유통됐다고 한다. 황금빛을 띠는 선산감자는 전국적으로 유명했으나, 2009년 말 낙동강 사업 이후 서원마을 감자 재배지는 거의 사라졌다.

백마제가 건설되면서 원동들의 경작 품목은 물론 서원마을의 살림살이도 큰 변화를 겪는다. 원동들은 당초 땅콩과 함께 무와 배추, 보리, 기장, 수수 등을 재배했다. 또 물을 끌어들이기 어려워 밭에도 벼를 재배하는 '밭나락' 농사도 지었다. 제방 건설 이후 땅콩 재배지는 급감한 대신 벼농사가 주를 이뤘다. 현재 원동들 90% 이상 벼가 재배되고 있다. 81년 감천 남쪽 둔치 백마제에 이어 95년 북쪽 둔치에 원동제를 쌓으면서 감천으로 인한 마을 범람 피해는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다. 원동들은 이제 서원마을을 비롯한 감천 주변 선산지역의 주 생계터전을 이루는 넓은 곡창지대로 변모했다.

◆감천의 변화와 꽈리의 추억

마을의 도랑 수준이던 감천은 현재 낙동강의 큰 지류 중 하나로 바뀌었다. 서원 주민들은 좁고 작은 감천이 넓고 유량이 많은 하천으로 변한 시점이 일제 강점기라고 말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은 2차대전 당시 전투용 비행기 기름을 충당하기 위해 국내 소나무를 많이 훼손했다고 한다. 각 지역마다 산에서 소나무를 베어 껍질을 벗긴 뒤 이를 이용해 기름을 짜내 항공유로 사용했다는 것. 감천 주변 산의 나무도 모두 베는 바람에 벌거숭이산이 됐다. 이 때문에 비가 오면 산의 물은 고일 틈도 없이 많은 양이 한꺼번에 하천으로 흘러들었고, 이 같은 과정을 반복하면서 하천은 자연스럽게 폭이 넓어지고 유량도 많아지게 됐다는 것이다.

감천은 일찍이 마을 사람들의 낚시터이자, 놀이터였다. 여름에는 수영도 하고, 고깔처럼 생긴 '꽈리'나 초망(좽이)을 이용해 고기를 잡았다. 또 감천 변에 조성된 이태리포플러 군락지에서는 그네를 매달아 타고, 부녀자들은 봄이면 춤추고 노래하며 희초를 즐겼다.

우윤봉(78) 씨는 "꽈리 카는 게 있어. 고깔 같은 거. 대나무 엮어가지고 저녁에 불 써가지고 댕기면서 고기를 잡았어. 잉어, 송어, 메기가 다 잡혔고"라고 말했다.

◆남산 봉수대와 소나무, 금오서원과 하마비

마을의 주산, 남산(藍山'169m). 소백산 줄기인 수선산'복우산'원통산'옥녀봉이 다시 사방으로 뻗어 내린 줄기 가운데 가장 남쪽에 나지막하게 솟은 봉우리이다. 동쪽 낙동강과 남쪽 감천과 함께 북쪽에서 마을을 둘러싼 이 산은 강물이 빛을 받아 쪽빛처럼 비친다고 남산으로 불린 것으로 추정된다.

남산의 대표적 상징물로는 금오서원과 봉수대가 있다. 고려 충신, 야은 길재를 모시기 위해 당초 금오산에 세워졌다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남산으로 옮겨져 김종직, 정붕, 박영, 장현광 등 영남학파 선비들을 추가로 배향한 금오서원.

주민들은 금오서원이 남산에 건립된 뒤 마을 입구에는 마을을 드나드는 이들이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라고 하마비(下馬碑)를 세웠다고 전했다. 이 비는 1970년대 조직된 4H 청년회원들이 4H 표지석으로 사용했으나 지금은 관리 소홀로 사라졌다는 것.

우윤봉 씨는 "금오서원 5현을 모신 자손들이 하마비를 만들어 놓았는데, 깨져서 나뒹굴었어. 새마을운동 발상 시절에 마을 청년 단체가 그걸 주워다가 뒷면에 '원1동 4H구락부'라고 써 가지고 마을 입구에 세워놓았는데, 잃어버렸어"라고 말했다.

남산에는 금오서원 외에도 조선시대 세워진 봉수대 터가 남아 있다. 남산 정상 북쪽의 봉수는 조선 세종 때 정한 봉수 5간선(幹線) 중 제2선인 동래에 속한다. 칠곡 약목의 박집산, 구미 인동의 건대산, 구미 해평의 석현 봉수 신호를 김천 개령의 감문산, 김천의 소산, 상주의 회룡산으로 전달하는 직봉이었다.

남산 중턱에는 또 30년 전까지 수령 300년 된 소나무가 있었다. 1970년대 동제가 사라지기 전까지 마을 제사의 대상이 됐던 당산나무였다. 새마을운동이 일어나고 미신타파 분위기 속에서 동제는 폐지됐고, 주민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소나무는 1981년쯤 누군가에 의해 잘려나간 것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 새 소나무가 자랐고, 현재 수령이 30년쯤 됐다. 주민들은 이 소나무를 '새끼 소나무'로 부르고 있다. 주민들은 이 새끼 소나무가 당산나무의 대를 이었다고 믿고 있다. 서원마을은 이처럼 낙동강과 감천, 남산에 기대 아름다운 공동체를 일구고 있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공동기획:매일신문·(사)인문사회연구소

◇마을조사팀 ▷작가 이재민·여수경 ▷사진 박민우 ▷지도일러스트 장병언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