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정기용을 처음 만난 것은 텔레비전의 한 오락 프로그램이 온 나라에 도서관 짓기 열풍을 일으키던 무렵이었다. 선생은 순천'제주'서귀포'진해에 기적의 도서관을 지었다. 선생이 설계한 어린이도서관은 주변 풍경에 가장 잘 어울리도록 지어졌으며, 아이들이 동굴 같은 곳에서 책을 읽고, 다락방에서 뒹굴 수도 있게끔 세심하게 공간구성이 되어 있다.
건축가 정기용이 생각하는 집은 무엇일까? 선생은 "좋은 집이란 거주하는 사람의 삶의 흔적이 서서히 누적되어 그 사람의 향기가 배어나오는 그런 집"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전 국민의 60~70%가 거의 획일적인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고, 주택의 사용가치보다는 교환가치가 훨씬 우월한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모든 시민들이 살기 위해 아파트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팔기 위해 아파트를 구입한다는 것은 늘 이사갈 준비를 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이웃과 더불어 살 시간과 공간을 포기하는 일이다. 그래서 이는 사는 것이 아니라 대기하는 것이다. 거주하는 집을 대합실처럼 활용하는 것이다. 대기하는 대합실 속에서의 삶이란 임시적이고 즉흥적이며 연속성이 없다. 시간이 되면 모두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유목민들의 모습이다. 이런 도시에서 공동체니 이웃관계니 하는 이야기들은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의 도시는 어떤가? "한국은 공사 중이다. 공사는 늘 파괴를 전제로 한다. 이는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이런 열기를 지속하다가는 이 땅에 남은 것이라고는 폐허뿐일 것이다. 쓰레기 하치장도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쓰레기만 남을 것이다. 이런 속도로 파괴와 건설이 지속되다가는 궁극적으로 과거와 현재가 실종되고 오직 미래만 남을 것이다. 늘 건설만 하면서 살아 있어야 할 도시는 실종되고, 앞으로 태어날 도시란 늘 그 얼굴을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알 수 없는 도시, 알 수 없는 나라, 더 이상 무엇이 되려 하는지 가늠할 수 없는 땅 한복판에 우리가 서 있다."
선생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과 도시가 위기이며, 우리의 삶이 안정된 공동체 속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유목민처럼 떠돌아다니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그러면서 거기 여전히 존재하는 정신의 근원으로서 우리 전통의 초가와 너와집, 흙건축의 미덕을 말한다. 그는 건축이 도구화되고 상품화되면서 문화의 논리보다는 경제나 취향의 논리를 더 선호하게 된 현상을 비판한다. 지속가능한 건축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그는 건축가로서 할 수 있고 개입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재료인 흙을 통해서 현대인들의 삶을 수용해보고자 한다. 선생은 흙을 단순히 자연의 건축재료로만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의 중요한 인자로서, 우리들 삶의 따뜻한 풍경으로서, 그리고 우리 모두가 먼 옛날부터 공유하던 하나의 가치로서 바라본다. "현존하는 도시에 관한 한 우리들이 견지해야 할 태도는 막연히 땅에 대한 사랑을 읊조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실재하는 자연으로서의 땅에 대한 역사적 관계맺음이다."
우리들이 사는 집과 도시에 대한 선생의 성찰은 우리의 삶과 정신의 근원에 닿아 있다. 그러므로 선생이 건축을 조형예술보다는 인문사회과학의 영역에 포함시키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화평론가 홍성태는 정기용을 '감응의 건축가'라고 부른다. 정기용 선생은 자신의 건축이 행해지는 장소에 대해 미안해하는 희귀한 건축가이다. 우리의 척박한 공간문화는 모두가 자신을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정기용 선생은 사람들이 서로 배려하고, 사람들이 자연을 존중하는 건축을 추구한다. 그렇게 해서 선생은 야만의 사회를 진정한 문화의 사회로 바꾸는 작업을 꾸준히 펼쳐왔다. 많은 집을 지었지만, 정작 자신은 지팡이 꽂을 땅 한 뼘 갖지 못했던 선생은 한국의 많은 공간을 통해 시를 쓰고, 시적 정의를 현실로 만들었다. 부디 하늘에서도 아름다운 집을 지으시길.
용학도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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