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에 실린 단편들 중 '애러비'에 꽂혀 몇 번을 되풀이해 읽었다. 더블린의 한 소년이 모든 난관을 헤치고 정말 가고 싶었던 아라비안 야시장 '애러비'에 가는 소설이었다. 그때부터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 중 백미(白眉)로 단연코 '애러비'를 꼽기를 어디서든 주저하지 않는다. 그래서 실크로드에서의 밤을 하루도 빠짐없이 야시장에서 보냈다. 그야말로 소년의 애틋한 욕망과 좌절이 담긴 '애러비'를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안(西安)의 역전과 야시장은 명절 전의 우리나라 시장과 별다른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란저우(蘭州), 우웨이(武威)도 여느 중국의 시장처럼 거의 한족(漢族)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신장(新疆) 위구르자치구의 첫 야시장 격인 장예(張掖)와 둔황(敦煌)을 결코 놓칠 수 없었다. 나의 애러비는 아라비안 바자르여야만 했던 것이다. 장예의 숙소에서 저녁식사를 마치자마자 이번 실크로드 탐사에서 급조된 '야시장 탐색대' 몇 명과 두근대는 마음으로 도시의 중심가로 나섰다. 장예는 실크로드에 있는 교역 중심지로, 고대 대상(隊商)들이 중국과 서방을 연결하며 오가던 곳이며, 현재의 도로와 1950년대에 건설된 철로가 고대 실크로드와 나란히 뻗어 있다고 했다. 밤 공기는 사막도시답게 감미로웠다. 만리장성 유적 도시 중의 한 곳이어선지 도심 곳곳에 남대문만 한 성곽과 성문들이 환하게 빛을 밝히고 있었다. 짧은 중국어와 필담(筆談)으로 묻고 또 물어 장예의 야시장을 찾을 수 있었다. 대구역 광장만 한 장소에 수많은 포장마차와 테이블 그리고 가족과 연인, 친구들이 술과 음식을 먹으며 북적이고 있었다. 풍선을 든 아이들이 광장 여기저기를 뛰어다니고, 마치 인종 전시장이라도 되는 듯 한족, 회족, 위구르족 그리고 다른 소수민족인 듯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담소하며 술이나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이국적인 풍경과 양고기 굽는 냄새, 포장마차마다 뿜어내는 흰 연기가 화려한 불빛에 싸여 도심의 하늘을 부옇게 물들이고 있었다. 누군가 영어도 전혀 통하지 않더라고 투덜대며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왔다. 장예의 야시장과 밤은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게 칭다오 맥주와 양고기 냄새에 오래 버무려져 기억에 남아있을 것이다.
이튿날 들른 둔황의 야시장도 더없이 화려했다. 역시 유네스코의 문화유산 지정도시다웠다. 현란한 조명과 언제 잠들지 모를 사람들이 끊임없이 내 곁을 툭툭 스치며 지나갔다. 거리의 노점상들도 사막의 낮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를 정도로 활기찼다. 아, 어쩌면 이 사람들은 아침형이 아니라 야시장을 활보하기 위한 올빼미형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뜬금없이 들었다. 역시 온갖 음식들과 앉을 자리도 없이 빼곡하게 들어찬 노천 식당엔 여러 종류의 언어로 넘쳐났다. 위구르인들일까, 한족들일까, 아니면 소그드인, 회족 등의 소수민족들일까. 묘하게 뒤섞인 소리들에 귀 기울인 탓에 애러비에 늦게 도착한 더블린의 그 소년처럼 넋을 잃어버렸다. 저 온갖 과일들과 철 또는 금도금을 한 물건들은 도대체 이 사막 어디에서 난 것들일까, 사막의 한가운데 누란의 호수처럼 어디로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갑자기 까닭 모르게 애러비의 소년처럼 불안해 황급히 택시를 타고 그 이름도 국제적인 '둔황국제호텔'로 돌아와 버렸다. 놀라움은 둔황을 지나고 투루판을 거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두었던 소년의 아라비안 시장이 너무 상업적으로 변해버렸단 억울함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하밀(哈密)과 투루판, 쿠차를 거쳐 사막길을 끝없이 달릴 때 길가에서 손을 흔드는 소년들의 눈망울을 멈춘 창밖으로 유심히 보게 되었다. 상상했던 더블린 그 소년의 눈빛이었다. 더군다나 버스 고장으로 멈춰선 악수에서의 노점에선 양을 안고 어르다가 깨끗하게 목을 그어버리는 소년도 만났다. 비정(非情)일까, 본성(本性)일까 끊임없이 의문이 드는 순간이었다.
카슈가르의 가장 큰 이슬람 사원인 '에티칼 마스지드' 옆도 온통 바자르였다. 귀금속과 노점상이 사원 광장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구시가지 옆 신장 최대의 바자르엔 그야말로 동서남북, 중앙아시아의 온갖 물품들로 가득했다. 오천여 곳이 넘는 점포엔 도대체 없는 물건이 무엇일지 의문스러웠다. 캐시미어를 우리나라 백화점에서 칠만원을 주고 샀는데 만원도 채 안 된다고 울상을 짓는 일행도 있었다. 하지만 우린 실크로드 바자르를 거치는 동안 흥정의 달인이 되어 있었다. 백위안(元)을 부르는 제품이 돌아서 나오자 이십위안으로 떨어졌다. 뚝 떨어졌다. 대구의 상인이 그 유명한 실크로드의 상인을 이기는 순간이었다. 올여름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탐사엔 소그드상인들에게도 한 번 도전해봐야겠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글:표병관(사단법인 '몸과 문화' 이사장)
사진:박순국(전 매일신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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