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4월의 어느 날, 만 다섯 살배기 계집아이였던 나는 질투에 온몸을 활활 불태우고 있었다. 오빠의 소풍가방을 잡은 채 같이 데려가 달라고 앙앙 울며 떼를 썼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고, 그 분을 삭이지 못해 오후엔 사촌 여동생과 찻숟가락 쟁탈전을 벌였다. 한잠 자고 일어난 저녁 무렵엔 큰집 언니의 하이힐을 신고 걷다가 무릎을 깨기도 했다.
어쨌든 '미운 일곱 살'에 막 진입하던 터라 그때의 나는 사소한 일에도 앙앙불락하며 어른들의 관심과 애정 쟁탈에 온힘을 쏟았던 듯하다. 그날 아래층 벽에 달린 커다란 스피커에선 '돌아가는 삼각지'와 '그리움은 가슴마다'가 흐르고 있었던가.
내친김에, 또 제자랑한다고 흉보겠지만 나는 참 기억력이 유별났다. 세 살 무렵, 언니와 오빠들 모두 가을소풍 준비에 바빴던 어느 날 아침 우리 집에서 사촌이 태어났다. 10월의 어느 아침인데다 아이들의 소풍날이어서 온 집안사람들이 모두 동분서주 하던 듯한데, 누구의 간섭이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처음 가파른 계단을 낑낑대며 올라간 그 뿌듯한 성취감에 나는 이층 동쪽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엄마!'라고 소리쳤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훅 끼치는 열기와 커다란 '백철 대야'에 담기기 직전의 발갛게 온몸을 떨며 울음을 터뜨리던 인형만한 아기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빨리 방문을 닫으라던 할머니를 보았다.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나는 멍하니 서 있었고, 아주머니가 달려와 문을 탁 소리나게 닫았다. 이것이 이후 소풍 때마다 떠올려지던 내 생애의 첫 기억이다.
지난겨울의 혹한 때문인지 올 봄은 유난히 꽃이 예뻤다. 그래서 이 주일 전쯤 소풍을 다녀왔다. 보온병에 커피를 담고 고구마와 바나나, 요구르트를 바구니에 챙겨들고 간 인근의 대학이 마침 축제 중이라 분홍 솜사탕을 들고 벚꽃 길을 걷기도 하고 여린 잎 돋는 수양버들 아래 연못가에서 햇볕을 쬐기도 했다.
참으로 애틋한 것은 그 날 소풍길에 사온 예쁜 금붕어 두 마리가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버린 것이다. 옆 사람의 만류도 뿌리치며 '반담이, 미셸이'란 이름도 짓고, 인터넷을 뒤져 어떻게 키우면 되는지, 어항 벽을 손톱으로 자주 톡톡 두드리며 애정을 쏟았는데…. 역시 내게 소풍이 주는 의미는 늘 달콤하고 쌉싸래한 모양이다.
박미영 (시인·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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