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필귀정] 그들이 해서는 안 될 말 한 가지

중상주의로 대변되는 상업의 번성은 오늘날 유럽을 있게 한 원동력이다. 질 좋은 상품을 만들고 이를 공급하는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의 활약이 유럽의 부흥을 견인했다. 중세 유럽에서 유행해 근세까지 이어진 동직(同職) 조합인 '길드'(Guild)는 도시 발전에 어떤 작용을 했는지, 또 어떤 부작용을 남겼는지를 증거하는 좋은 사례다.

길드는 회원이 상품을 사거나 큰 리스크를 안게 되었을 때, 또 사업에 실패하거나 사망할 경우 서로 돕기 위해 만든 공동체였다. 그러나 11세기 말 이후 길드는 점차 변질되기 시작했다. 상호부조의 성격은 퇴색하고 도시금제권(都市禁制圈)이라는 차단벽을 만들어 상업을 독점하면서 이익집단으로 굳어져 갔다. 상거래를 길드 회원만의 전유물로 여기고 외부인이 독점을 깨거나 동일한 상품을 취급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이런 폐쇄성은 역풍을 불렀다. 시민 계급의 성장은 폐쇄적이고 특권 의식에 사로잡힌 길드의 해체를 앞당겼다. 자신들의 이권 보호를 위해 경쟁을 회피하고 눈앞의 이익만 중시하다 빚은 결과다.

산업혁명 이후 등장한 공장은 길드를 대체한 경제 시스템이다. 하지만 대량생산을 통해 부를 축적한 기업과 조직화된 노동조합에도 길드의 그림자는 남아 있다. 최근 현대차노조가 장기 근속 직원의 자녀 우선 채용을 단협안으로 확정한 것도 자신들의 이권 보호를 위해 길드가 시행한 도시금제권과 전혀 다를 바 없다. 정년퇴직자, 25년 이상 장기 근속자의 자녀를 우선 채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노조의 요구에서 길드가 저지른 오류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회사 발전을 위해 오래 땀 흘린 대가를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경쟁의 싹을 일찌감치 자르고 울타리를 치는 이 같은 움직임이 어떤 결과를 부를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2차 대전 당시 미국의 무기고 역할을 한 제너럴모터스(GM)는 1950년대 초 미국 최대의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당시 GM이 미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했다. GM의 CEO를 지낸 찰리 윌슨이 1953년 국방장관에 임명되자 인사청문회에서 이런 답변을 했다. "미국에 좋은 것은 GM에도 좋습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장하준 교수가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에서 지적한 것처럼 GM에 좋은 것이 항상 미국에도 좋은 것은 아니라는 현실을 떠올려 봐야 한다. 현대차나 삼성이 국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지만 대한민국과 국민에게 득이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요즘 증권가에서는 정부 정책이 주식시장을 이상한 괴물로 만들고 있다는 불평이 쏟아지고 있다. 소위 블루칩으로 불리는 삼성, 현대차 등 특정 기업의 주식만 오를 뿐 나머지 기업들의 주식은 지지부진하다는 게 불만의 근거다. 많은 이익을 내는 기업의 가치가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이런 양극화 현상은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 양극화 현상만큼이나 우려되는 부분이다.

기업의 과도한 이익과 이익 추구는 시장과 소비자를 경시하는 근거 없는 자만심으로 변질돼 결과적으로 기업에 독배가 될 소지가 크다.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현대기아차가 국내 소비자들에게는 '응기나는' 기업이 된 이유를 살펴봐야 한다. 현대차 소비자들은 현대라는 기업 앞에 자신은 '봉'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고, 협력업체들은 자신들이 '밥'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귀족 노조'도 모자라 '세습 노조'라는 꼬리표를 하나 더 단 현대차 노조의 위세가 블랙홀이라는 사실에 절망하고 있다.

사람들은 값싸고 질 좋은 상품, 편의성을 쫓지만 다른 한 손에는 도덕률이라는 잣대를 들고 있다. 이 도덕률은 기술과 가격에 대한 평가를 넘어서서 기업 정신과 정의에 대한 엄격한 판단에 이른다. 한마디로 민심이다. 현대차가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는 것과 반비례해 정서적으로는 국민과 점점 더 멀어지는 현실은 현대라는 기업에 과연 아무런 파장이 없을까. 망(亡)한 자가 흥(興)하기보다 흥한 자가 망하기는 더 쉽다. 동반성장, 상생경영이 개도 돌아보지 않는 말이 된다면 우리 기업들도 길드가 지나간 길을 그대로 밟게 될 것이다. 기업에 있어 '이익은 처음이자 끝'이다. 그러나 이 말은 그들이 해서는 안 될 말 한 가지다. 이익과 탐욕이 더 큰 화를 부르기 전에 세상에 좀 더 겸손해지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徐琮澈(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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